김욱진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김욱진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문득 ‘걸어 보다’의 띄어쓰기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찾았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규정을 확인하는 것. 한글 맞춤법 제5장 제3절은 보조용언을 다룬다. 제3절 제47항은 “보조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경우에 따라 붙여 씀도 허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걸어 보다’가 원칙이고 ‘걸어보다’를 허용한다. ‘걷다’가 본용언이고 ‘보다’가 보조용언이 되기 때문이다. 보조용언 ‘보다’는 ‘어떤 행동을 시험 삼아 함’을 뜻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도로 ‘걸어 보다’로 띄어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걷다’와 ‘보다’를 모두 본용언으로 활용하고 싶은 이유에서다. ‘보다’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다’이다. 그렇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2022년 초 1주일 동안 100마일, 약 160㎞에 달하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걸으면서 바라본 경험이다.

‘포드주의’가 탄생한 미국, 미래 모빌리티를 이끄는 실리콘밸리에서 왜 ‘걸어 보기’였을까.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내가 갖는 정체성 때문이었다. 창업가, 엔지니어, 벤처투자자가 중심인 실리콘밸리다. 대한민국 공공기관에서 일한다는 배경 하나만 내세워 업무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실리콘밸리를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좁은 개념의 실리콘밸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둘러싼 공간을 가리킨다. 샌프란시스코와 샌타클래라, 오클랜드를 연결하는 U자형 지역의 거리를 재어 보니 하루에 25~30㎞씩 걷는다고 치면 1주일이면 충분했다.

배낭을 꾸렸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스마트폰 지도를 나침반 삼아 집을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뗀 지 3시간이 지나지 않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예상치 않게 샌프란시스코만에서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와 재활용센터를 마주했다. 사람 키보다도 큰 압축 폐기물의 위용은 순식간에 나를 압도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기계를 이용한 작업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전깃줄에 줄지어 앉은 새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와 쓰레기 매립지는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지만 샌타클래라 카운티에만 23개 ‘슈퍼펀드’ 지역이 있다. 언뜻 진취적 느낌의 벤처캐피털이 연상되는 ‘슈퍼펀드’는 사실 정반대를 의미한다. 슈퍼펀드 프로그램은 미국 환경청(EPA)이 유해폐기물 오염지역을 지정해 복구하는 연방정부 차원의 대표적 환경정화 사업이다. 다시 말해 슈퍼펀드는 유해폐기물에 의해 오염된 곳으로 공식 인증된 지역을 가리킨다. 카운티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슈퍼펀드를 보유한 곳이 바로 샌타클래라다. 반도체산업 부흥으로 샌타클래라 밸리는 실리콘밸리로 우뚝 섰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가장 오염된 지역이 됐다. 실리콘밸리를 걷고 나서 깨달은 점은 혁신가의 이상은 철저히 현실의 과제에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걷다 보면 자동차로 이동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입장에서 자동차 이동은 사이가 텅 빈 점과 점을 찍는 행위다. 이에 비해 걷기는 선을 긋는 활동에 가깝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은 기술의 폭발적 발전에 무엇으로 대응할 것인가. 단순히 수많은 점을 찍는 행위를 넘어서 점을 이으며 서사를 만드는 활동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