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도 도쿄에서 열차로 30분이면 닿는 지바현 후나바시 시(市). 지난 28일 오후 후나바시역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5분 정도 더 이동해 '마고메 영원(靈園)'이라는 커다란 공동묘지에 닿았다.
여전히 강하게 내리쬐는 뙤약볕 속에서 빽빽하게 서 있는 묘석들을 지나 중심부로 터벅터벅 걸어가니 유독 크고 높은 비석이 보였다.
앞면에 '간토대지진 희생동포 위령비'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이 추모하는 희생 동포는 바로 조선인이다.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關東) 지방을 덮친 규모 7.9의 지진은 도쿄도에 인접한 지바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선인을 겨냥한 헛소문으로 일본에서 한반도를 떠나온 6천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바현에서 조선인 피해자가 많이 나온 곳이 후나바시였다.
다나카 마사타카 일본 센슈대 교수는 "지바현에서 조선인 학살이 가장 분명하게 일어난 곳이 후나바시·나라시노·야치요였다"며 "해군 송신소로부터 무선으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나왔고, 송신소장이 주민들에게 무기를 건네 경계하게 한 것이 학살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 바 있다.
높이가 약 5m인 비석은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이 1947년 3월 1일에 세웠고, 196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뒷면에는 "야마모토 군벌 내각은 재향 군인과 우민을 선동하고 교사해 우리 동포를 학살하게 했다.
재류 동포 중에 피살자는 6천300여 명에 이르며, 부상자 수만 명에 달하니 그 희생 동포의 원한은 실로 천추 불멸할 것이다"는 문구가 있다.
비석 앞에서 우연히 만난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관계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됐고 크다"며 "비문 자체가 학살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본래는 마고메 영원의 구석에 있었는데, 묘지가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중심에 위치하게 됐다"며 "비석 구역이 일반 묘역의 9배 정도 된다"고 덧붙였다.
평소 비석을 찾는 이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사람이 꽤 오는 것 같다"며 "누가 가져왔는지 모르는 꽃이 종종 놓여 있다"고 말했다.
비석 주변은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앞두고 정비돼 깔끔했다.
위령비 왼쪽으로는 자그마한 비석 2개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인 학살 이듬해에 후나바시 불교 단체가 희생자들을 위해 세운 것이고, 다른 비에는 1963년 위령비를 옮긴 이유가 담겼다.
지바현의 또 다른 조선인 학살 장소인 야치요는 후나바시 동쪽에 있다.
야치요의 불교 사찰인 간논지(觀音寺) 뒤편 묘지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를 위한 추도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왼쪽에는 범종이 있는 종루, 오른쪽에는 1999년에 세운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와 위령탑이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조선인을 위로하는 데 헌신한 일본 불교 승려 세키 고젠 씨가 부지를 제공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85년 9월에 건립했다는 보화종루다.
범종은 한국의 옛 보신각 동종을 본떠 만들었고, 누각은 한국 기와와 목재로 지었다.
한국인이 일본에 세운 유일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위령 시설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한국 전통 양식의 건축물을 보니 반갑기도 했지만, 건립 연유를 떠올려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종루는 단청이 벗겨지고 기둥에 균열이 생겨 보수를 위한 모금 활동이 추진되기도 했다.
다음날에는 도쿄 스미다구에 남아 있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토대지진과 태평양전쟁 종료 직전 무렵의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비극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혼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도쿄도 위령당 옆에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다.
'추도'(追悼)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비석은 간토대지진 50주년이었던 1973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개최된다.
추도행사 실행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민족 차별을 없애며, 인권을 존중하고, 선린우호와 평화의 큰길을 개척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는 글을 비석 옆에 남겼다.
하지만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는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올해 추도식에 또다시 별도의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요코아미초에서 불과 5㎞도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에서는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가 사유지를 매입해 2009년에 건립한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비'를 만날 수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돼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일본의 군대, 경찰,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조선인이 살해됐다.
식민지하에 고향을 떠나 일본에 온 사람들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 이사는 "이곳은 조선인 학살 현장과 가깝다"며 "당시에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이 회원국의 방위비 증액을 촉진하는 최대 8000억 유로(약 1229조원) 규모의 자금 동원 계획을 내놨다.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유럽 재무장 계획’을 공식 제안했다. 이번 계획은 국방 부문에 EU 재정준칙 적용을 유예하는 국가별 예외조항을 발동하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다. 회원국이 국방비에 공공자금을 적극 투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조치다. 재정준칙에 따라 회원국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각각 GDP의 3% 이하, 60%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현재 전체 27개 회원국 가운데 NATO에 속한 23개국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GDP)의 평균 1.99% 수준이다. 예외조항 발동으로 회원국이 국방비를 GDP의 1.5%가량 늘리면 4년간 6500억유로(약 998조원)가량의 재원을 창출할 수 있다고 폰데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설명했다.다만 이번 국가별 예외조항은 특정 회원국에 대한 재정준칙 적용을 일시 유예하는 것으로, 모든 회원국에 일괄 적용되는 일반적 예외조항과는 다르다.집행위는 EU 공동예산을 활용해 1500억 유로(약 230조원)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구상도 내놨다. 이 자금은 방공 체계, 미사일, 드론 등 군사장비를 회원국들이 공동 조달하는 데 활용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에도 쓸 수 있다.이번 구상은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유럽에 제공했던 ‘안보 우산’이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 파행 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한 직후 나온 대책이기도 하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유럽인들은 미국의 지원, 그리고 수
멕시코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멕시코산 제품 25% 관세 부과에 맞서 미국산 제품에 대한 보복관세 부과를 예고했다.4일(현지시간)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미국의 결정에 관세·비관세 조치로 맞대응한다”며 “오는 9일 대통령궁 앞 소칼로 광장에서의 군중 연설을 통해 구체적인 관세 품목을 발표하겠다”고 발표했다.셰인바움 대통령은 미국의 관세 부과에 대해 “트럼프 정부 결정에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 내 상품 가격 상승으로 미국 시민과 기업 모두에 초래될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트럼프의 결정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다만 멕시코 대통령은 “무역전쟁을 벌이려는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외신들을 이 발언을 지속적인 협상 의지라고 해석했다.미국은 이날 0시 1분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 대해 25%, 중국에 대해 10%+10% 세율 적용을 시작했다. 캐나다와 중국은 이미 이에 대응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멕시코 증시는 전날 오후에 이어 이날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페소화 환율도전날과 비교해 달러 대비 약 1% 상승해 평가절하됐다.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
미국의 한 10대 아시아계 소년이 자신이 지원했다가 불합격된 일부 명문대학들을 상대로 인종차별 관련 소송을 제기했다.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포스트는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 출신 소년 스탠리 종(19)의 사연을 보도했다.스탠리는 매년 200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응시하는 시험인 SAT(대부분의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데 쓰이는 표준화 시험)에서 1590점 이상의 점수를 받은 단 2000명의 학생 중 한 명이다.스탠리의 고등학교 학부 성적은 4.0 만점에 4.42였으며, 그는 고등학교 졸업도 전에 구글로부터 박사급 직무 제안을 받았다. 컴퓨터 과학을 전공할 계획이었던 스탠리는 고등학생 시절에도 전자 문서 서명 플랫폼인 '래빗-사인'이라는 스타트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버드나 MIT에 입학할 것으로 예상됐던 스탠리는 메사추세츠공과대(MIT)·UCLA·캘리포니아공대(칼텍)·스탠퍼드·UC버클리 등 16개 대학에 지원했으나 모두 불합격했다.스탠리를 받아준 대학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합격률 31%)와 메릴랜드 대학교(합격률 44%) 뿐이었다.충격을 받은 스탠리의 아버지는 "아시아계 학생들이 대학 입시에 있어 더 높은 기준을 적용받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저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절 통보가 하나둘씩 오기 시작하더니 계속됐다. 놀란 마음이 점점 좌절감으로 변했고, 결국 분노로 이어졌다"고 말했다.결국 스탠리의 아버지는 스탠리가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확신했고, 스탠리를 거부한 대학들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하기로 결정했다. 고소장에는 "스탠리의 입학 결과는 그가 박사 학위 또는 동등한 실무 경험을 요구하는 구글의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