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달콤한 말 뒤에 숨긴 너의 의도에 속지 않아"
세계적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2023)를 한국에 소개한 건 대입 시험이었습니다. 1980년대 송동준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학력고사 출제위원으로 끌려갔어요. 보안 때문에 ‘감금 생활’을 하던 그는 무료함을 달래려 틈틈이 독일어판 소설을 읽었습니다. 읽다 보니 너무 재밌어 한국어 번역을 했어요. 합숙 기간을 마치자마자 민음사에 번역 원고를 가져갔고 원고는 곧 책으로 출간됩니다.

이 소설이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쿤데라는 지난달 세상을 떠난 체코 출신 프랑스 작가죠. 프랑스 신문들이 일제히 1면에 그의 부고 소식을 전했을 만큼 쿤데라는 문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소설가입니다. 1984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8년 국내 출간된 이후 한국에서만 100만 부 넘게 팔렸어요.

소설은 체코의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등 네 남녀의 사랑과 우정, 이해와 오해를 다룹니다. 연애소설이면서 철학소설이고, 개인의 삶을 다루는 동시에 역사적 비극을 녹였습니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을 오가며 생각거리를 던지는 게 이 책의 특징입니다. 마치 자극의 N극과 S극처럼 정반대인 사람,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 얘기를 통해 인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성찰합니다. 여기에 ‘삶이 수레바퀴처럼 영원히 반복된다’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도 녹아듭니다. 외과의사였던 토마시가 공산주의 세력을 비판하는 칼럼을 잡지에 실었다가 병원에서 쫓겨나 유리창 청소부로 일할 때 개인사와 비극적 시대사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이 소설은 왜 자꾸 독자를 헷갈리게 할까요. 무언가에 확신을 갖고 사유를 멈추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키치’는 이 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입니다. 쿤데라는 “(이 소설의 일부는) 키치에 대한 에세이”라고 말했죠. 키치란 쉽게 말해 거짓 가면을 뜻해요. 가짜인데 진짜인 척하는 것, 진실을 가린 허상, 예술을 논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벌이를 추구하는 것. 삶이나 인간 존재에 의문을 품지 않으면 이런 키치에 휘둘리며 살기 십상입니다. 아이돌 아이브가 최근 내놓은 노래 ‘키치’는 “달콤한 말, 뒤에 숨긴 너의 의도대로 따라가진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데, 쿤데라가 말했던 키치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상당한 책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 남편의 정부와 누드 사진을 찍는 파격적 장면,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를 비롯한 아름다운 문장들, 체코의 실제 역사와 맞물리는 소설 속 사건들…. 다채로운 매력이 이 책을 일찌감치 고전의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 그래서 다시 읽기를 참을 수 없는 책. 우리는 그런 책을 고전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