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세계에도 동성애가 있다...그게 자연이다"
수컷 기린 두 마리가 구애활동인 '목걸기' 행동을 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제공

어떤 결의가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호소하는 출판계에서 출판할 결심을 하는 건 매번 굳건한 다짐을 요구한다지만,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벽돌책'이나 어떤 저자·출판사의 첫 책, 논쟁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책은 독자 입장에서도 예사롭게 보아넘길 수가 없다.
"동물의 세계에도 동성애가 있다...그게 자연이다"
최근 국내 출간된 <생물학적 풍요>가 바로 그런 책이다. 총 분량은 1356쪽. 웬만한 책의 두 배가 넘는다. 무게만 2kg에 육박한다. 동아시아 출판사가 새로 선보이는 의치약·생명공학 브랜드 '히포크라테스'의 첫 번째 책이자 동물들의 동성애를 다룬 문제작이다.

저자는 캐나다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언어학자 브루스 베개밀. 1999년 원서가 출간되자 그 해에 미국 뉴욕 공립도서관이 '올해의 기념비적 책'으로 꼽았다. 200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소도미법(동성 간 성행위를 금지한 법) 폐지 판결, 20018년 인도 대법원의 동성애 비범죄화 판결에서 근거로 인용됐다.

영미권에서 화제가 됐던 책이지만 국내 번역 출간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여년의 간극에서부터 이 책이 던지는 화두가 우리 사회에 꽤나 뜨거우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선형 히포크라테스 편집장은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 1쇄를 다 팔아도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가격을 책정해 최대한 진입장벽을 낮췄다"며 "역사적으로 사회와 법을 바꾼 책이기 때문에 세상을 흔들 각오, 출판인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국내 출간을 준비했다"고 했다.

책이 대상으로 삼은 서양권의 생태 환경이 국내와 다르다는 점도 한국어판 출간이 더뎠던 이유 중의 하나다. 김 편집장은 "한국판에는 부록에 '동물명 조견표'를 추가해 일부 생물을 편집자들이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고 했다.
"동물의 세계에도 동성애가 있다...그게 자연이다"
동물 동성애에 대한 최초의 사진 기록. 1923년 스코틀랜드에서 한 쌍의 수컷 흑고니가 함께 지은 둥지에서 사진에 찍혔다. 히포크라테스 제공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부제가 책의 내용을 훌륭하게 요약한다. 20세기 후반까지 과학적으로 문서화된 동물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섹슈얼리티 연구를 종합, 정리한 백과사전이다. 1부는 동물 동성애의 다양한 형태와 이전까지의 연구를 분석했고, 2부는 구체적 사례들을 삽화,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동물들이 애정을 표현하고 짝을 짓는 방식은 예상밖으로 다양하다. 동성애 행동은 전 세계 약 450여 종의 동물에서 발생하며, 특정 지역이나 동물군에 한정되지 않는다. 일부는 자손을 가지려 여러 전략을 구사한다. 예컨대 '레즈비언 기러기'는 한 암컷이 임의의 수컷과 교미한 뒤 알을 수정하면 암컷끼리 양육하며 장기적 유대관계를 이어간다. 대리부를 찾는 셈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동물들도 동성애를 한다'는 내용 때문에 이 책이 꾸준히 주목받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책의 태도다.

베개밀 이전 서구 학자들도 동물 동성애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이성애와 번식 중심주의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동성 동물끼리 구애활동을 하거나 교미를 시도하는 건 이성 간 관계 맺기에 실패한 뒤 그를 대체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혹은 병에 의해 발생하는 오류라고 봤다. 과학 논문인데도 '수컷 딱정벌레의 변태적인 성 행동'처럼 가치 판단이 들어간 제목을 썼다. 인간 사회가 갖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동물 연구에 덧씌운 것이다.

<생물학적 풍요>의 태도는 다르다. 일단 동물 동성애를 성행위에 한정하지 않고, 구애, 애정, 성행위, 짝결합, 육아의 5가지 범주로 분류해 접근한다. 저자는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기이하다"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의 잣대로 자연을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이한(queer) 동물의 삶은 우리 상상을 뛰어넘으며, 이미 다양하게 존재한다.

물론, 동물 행동에 대한 모든 연구는 결국 그것에 대한 인간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동물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직접 말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동물 행동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찰에 의존해야 한다."

책은 생물학 패러다임이 변화해온 역사를 함께 다룬다. "진화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과 원칙 중 일부는 질문받고 도전받고 재검토되고 (일부의 경우) 모두 버려지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포스트 다윈주의의 진화론이다."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의 이론조차 끊임없는 논증과 의심이 필요하다. 그것이 과학이므로.

제목인 '생물학적 풍요'는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일반경제 이론을 차용해 저자 베개밀이 제안한 개념이다. 베개밀의 설명에 따르면 바타유는 과잉과 풍요가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고 봤다. 모든 유기체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고, 창조(출산)하고 소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과잉 에너지를 '탕진'한다. 배게밀은 이 이론을 생물학에 적용해 동성애, 트랜스젠더, 비생식적 이성애 등 '자손을 남기지 않은 다양한 관계맺기'는 생물계의 풍요를 나타내는 여러 표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동물에 대한 책이지만 독자는 결국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인간 사회의 정의에 대해 자문해보게 된다. 성애 없는 애착관계는 사랑인가? 그때 우정과 사랑의 차이는? 번식을 가정하지 않는 성애는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면 '딩크족(맞벌이 무자녀 가정)' 인간 이성애자의 사랑은 무엇인가? 이 책이 원서 출간 20여년 뒤에 한국 사회에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이유다.

들고 다니며 읽는 건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무게와 분량인데도, 출판사는 당분간 전자책을 출간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특정 부분만 검색해서 읽거나 발췌독하기보다는 두고 두고 깊이 읽히는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활자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