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서 자주 들리는 '고강도'…벨 감독 "유럽 축구서 일반적 개념"
여자축구 '전면 개혁' 언급…"유소녀·대학·WK리그까지 하나의 틀로"
[여자월드컵] 벨 감독이 부르짖는 '고강도'…여자축구 선진팀엔 '상식'
'고강도'는 콜린 벨 여자 축구대표팀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지만,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은 아니다.

이는 '하이-인텐서티(high-intensity)'의 번역어다.

벨 감독은 공식 석상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막론하고 이를 외쳐왔다.

오죽하면 대한축구협회가 2023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 응원 슬로건을 '고강도-높게 강하게 도전하라!'로 선정했을 정도다.

국내 지도자들과 차별화되는 특유의 철학으로 꼽힌 이 단어가 월드컵이 열리는 호주·뉴질랜드에서는 자주 들린다.

'강도 높은 경기', '고강도 러닝' 등 외국팀 지도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말을 꺼낸다.

지난 27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풋볼 스타디움에서 기자회견에 나선 잉글랜드 대표팀의 사리나 히르만 감독과 덴마크의 라르스 쇠네르고르 감독 모두 벨 감독이 자주 쓰는 스프린트, 질주, 피지컬 등의 용어와 함께 '하이-인텐서티'를 강조했다.

28일 시드니 외곽의 캠벨타운 스포츠 스타디움에서 만난 벨 감독은 전날 잉글랜드·덴마크 팀의 기자회견에 대해 언급하자 한숨부터 쉬었다.

그러더니 "말하기 답답하고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한국 여자축구에 생산적이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이 부르짖는 '고강도'…여자축구 선진팀엔 '상식'
벨 감독은 "대표팀 감독으로서 한국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봐야 한다"며 "미국은 고강도·피지컬, 이 두 측면에서 몇 년간 지배하고 있다.

(고강도는) 유럽 축구에서는 일반적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상적 개념을 한국에 가지고 온 것이다.

'격렬함'이라는 측면을 훈련 때 선수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며 "그래야만 고강도 경기를 할 때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훈련 시 선수들에게 다정하게만 대하면 콜롬비아 선수들과 부딪힐 때 얻어맞고서는 '왜 나를 제대로 지도하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다"며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나이지리아-호주전도 피지컬·강도, 두 가지 측면에서 결과가 나왔다"고 짚었다.

전날 나이지리아는 개최국 호주를 3-2로 꺾었다.

FIFA 랭킹은 호주(10위)가 높지만 공격수들의 빠른 스프린트를 통해 뒷공간과 측면을 두드린 끝에 나이지리아(40위)가 웃었다.

실제로 '고강도'의 원문인 '하이-인텐서티'는 여자축구에 대한 해외 연구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최근 여자축구에 대한 스포츠 과학 분야 연구가 본격화한 가운데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고강도'로 뛸 수 있는지가 경기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이 부르짖는 '고강도'…여자축구 선진팀엔 '상식'
고강도는 단순히 '많이 뛰는' 개념인 활동량과는 다르다.

최고 속력으로 올리거나 급격히 속력을 줄이는 과정에서 선수에게 체력적, 정신적 부하가 가해지는 활동·구간을 총칭한다.

여자축구 선수를 연구해온 미국 라크로스 스포츠과학·안전 연구소의 제이슨 베스코비 박사는 지난 13일 FIFA 트레이닝센터를 통해 유소년부터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로 수준이 올라갈수록 '고강도 러닝'이 더 요구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베스코비 박사는 유소년·대학·프로축구·대표팀 경기로 나눠 선수들의 움직임을 비교·분석, 한층 높은 단계에 안착하려면 '피지컬 간극'을 메워야 한다고 짚었다.

베스코비 박사가 자체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뛴 거리는 오히려 프로축구 경기가 대표팀 간 A매치보다 2%가량 많았다.

그러나 '고강도'로 뛴 거리는 A매치에서 12% 높게 나타났다.

벨 감독은 이런 학술적 논의가 그라운드에서 증명된 게 이번 월드컵이라고 본다.

실제로 콜롬비아전 직후 기자회견에서 고강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월드컵이 펼쳐지는) 여기가 국제적 표준이다.

콜롬비아·모로코·독일 모두 그 수준에 올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벨 감독은 이날 한국 여자축구의 '전면 개혁'을 언급했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이 부르짖는 '고강도'…여자축구 선진팀엔 '상식'
벨 감독은 "이 고강도 개념이 어린 시절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 WK리그까지 하나의 틀로 이어져야 한다"며 "한국 여자축구 시스템 전체가 재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회에서 이런 부분을 느끼고 있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대한민국 여자축구 전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명확한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며 "변화가 없다면 필리핀,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에 따라잡힐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추세에 맞게 우리가 더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벨 감독의 '고강도' 주창에 외신들도 주목한다.

스포츠 매체 디 애슬래틱은 콜롬비아전 직후 기자회견에서 벨 감독의 발언을 옮기며 세계 여자축구가 더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디 애슬래틱은 이번 대회 첫 경기를 치른 선수·감독이 모두 피지컬·체력이 중요해졌음을 체감했다고 전했다.

스페인의 호르헤 빌다 감독은 "지금까지 경기들만 보면, 이번 대회는 신체적으로 가장 격렬한 월드컵"이라고 말했다.

덴마크의 쇠네르고르 감독은 "지난해 유럽여자축구선수권대회(여자 유로)의 모든 경기에서 고강도 러닝·스프린트가 나왔다"며 "공 경합도 더 격렬해졌다.

랭킹이 높지 않은 팀도 거칠게 경기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경기 강도뿐 아니라) 여자축구의 모든 면이 향상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자월드컵] 벨 감독이 부르짖는 '고강도'…여자축구 선진팀엔 '상식'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