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재심 권고…영덕지원서 재심 예정
'영덕호' 납북귀환어부와 가족의 54년 한 풀어질까
"영덕호의 비극을 아시나요.

"
영덕호 납북귀환어부와 그 가족이 수십년간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피해 구제를 호소하고 있다.

19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영덕호 선원 가족 등에 따르면 강원 고성 거진항에 적을 두고 명태잡이를 하던 어선 영덕호는 1968년 11월 8일 동해에서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가 1969년 5월 28일 귀환했다.

선장과 선원 8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7명은 1969년 5월 28일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환영은커녕 오히려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영덕호 선원들은 같은 날 돌아온 동일호, 송학호 선원들과 함께 영덕경찰서 유치장이 아닌 망루에 구금돼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

지름 5m 규모 야외 망루 시멘트 바닥에 20여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영덕호' 납북귀환어부와 가족의 54년 한 풀어질까
처벌 이후에도 간첩이란 의혹 속에 장기간 감시와 사찰을 받았고 선원 가족 역시 감시 대상이 돼 고통을 겪었다.

고성에 살던 영덕호 선주를 제외한 선장과 선원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영덕군 영해면 대진1리 출신이다.

당시엔 선장이 주변 지인을 모아 타지역에서 고기잡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대진1리 북쪽 다른 마을에 있던 초소는 납북귀환어부들이 마을에 돌아온 이후 고 고명봉 선장 집 주변으로 이전됐다.

고 천수광 선원 집 바로 옆에는 보안대원이 상주하면서 선장과 선원들을 집중 감시했다.

영덕호 피해자들은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대부분 숨졌다.

한 선원 아들은 "아버지는 그 이후로 화투나 쳤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며 "아버지는 집을 나가면 1∼2주씩 안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또 함구 각서를 쓰고 나오다가 보니 피해를 겪을까 봐 가까운 가족한테까지 사정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생존한 선원 김영달(86)씨는 고령에 지병이 있어서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협박받기는 했다"고 밝혔다.

고성에 살던 선주 아들(60)은 "당시에 여섯살이어서 당시 상황을 잘 몰랐는데 학교 다닐 때 수사기관에서 두세달에 한 번 방문한 기억은 있다"며 "아버지가 고문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정상적인 몸은 아니었고 어머니가 보따리장수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한 선원 아들은 "납북이나 귀환 이후 조사 얘기는 못 들었다"고 했다.

선원 가족들 역시 취업이나 진학, 자격시험 등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그러다가 보니 취업이나 진학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선장의 손녀 고모씨는 "고모가 취업을 했다가 며칠 만에 돌아온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선원 아들은 "동생이 고등학교 때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3사관학교 시험을 쳤는데 합격하지 못했고 이후 은행 취업도 안 되는 등 직장을 못 구해서 장사를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원의 가족은 "조카가 육사 시험을 쳤는데 못 갔다"고 전했다.

한 선원 아들은 "어선을 몰려고 해기사 시험을 쳤는데도 계속 시간을 끌며 자격증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납북귀환어부 가족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겪은 고통, 가족들이 연좌제로 겪은 고생 등을 알게 됐다.

진실화해위는 조사를 거쳐 지난 2월 납북귀환어부들이 합동심문 등 조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국가가 어부들에게 사과하고 피해복구를 위한 실질적인 조처를 하며 재심 등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납북귀환어부와 그 가족들은 서로 연락하며 증거를 모으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재심을 준비해왔다.

재심은 대구지법 영덕지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족들은 "재심을 통해 수십년의 한이 풀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덕호' 납북귀환어부와 가족의 54년 한 풀어질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