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청와대 경호실. ‘그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청와대 경호원이 된 ‘정학’은 자신과는 다른, 자유분방한 동기 ‘무영’을 만난다. 신입 경호원 중 최고의 인재로 꼽히던 정학과 무영은 라이벌이자 친구로 우정을 쌓아간다. 한중 수교를 앞두고 그들에게 내려진 첫 임무는 신분을 알 수 없는 ‘그녀’를 보호하는 일.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다. ‘무영’도 함께.
20년이 흐른 어느 날. 정학은 ‘그날’의 흔적을 발견한다.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인 청와대에서다. 경호부장이 된 ‘정학’에게 전해진 다급한 소식. 대통령의 딸 ‘하나’와 수행 경호원 ‘대식’이 사라졌다. 정학은 무영과 그녀의 행방을 다시 쫓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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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의 해후, 그리움으로 다시 만난 그들의 '그날들'
중요한 인물이 공연 중간에 갑자기 사라질 때가 있다. 만약 지금 보고 있는 공연이 그렇다면, 그 순간을 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후 흐름과 맥락도 살필 필요가 있다. 보통 공연은 바로 그 순간에 테마를 담거나 인물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 극에 추진력을 높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그날들>도 그렇다. 무영은 그녀와 함께 사라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무영은 그녀와 함께 갑자기 정학의 곁을 떠난다.

<그날들>은 사라진 무영을 찾아 정학에게, 그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무영은 정학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고, 그녀에게는 절박한 사랑이었으며, 우리에게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무영이 어떻게, 왜 사라졌는지 공연은 단번에 알려주지 않는다. 하나와 수지가 암호문을 발견하고 푸는 속도에 맞춰 ‘그날’, ‘그 장소’로 우리를 천천히 데려갈 뿐이다.

무영이에 대한 우리의 안타까움은 시간이 갈수록 쌓인다. 하지만 정학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정학은 사라진 무영이 때문에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무영이 때문에 삶이 무너지기도 했고 그래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감정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무영이가 그립지만 그립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했다.
20년 만의 해후, 그리움으로 다시 만난 그들의 '그날들'
사실 무영이는 정학이보다 언제나 뛰어났다. 대통령 경호원이 될 때도 무영이의 성적은 정학이를 앞섰다. 사격 솜씨도 무영이가 더 좋았다. 그리고 무영이는 그들이 비밀리에 함께 지키던 그녀에게 더 빨리, 더 정확히 다가갔다. 정학이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무영이와 사랑에 빠졌다. 정학은 자신의 감정을 잘 알면서도 무영이를 위해 마음을 내려 놓았다. 하지만 그저 양보만 한 건 아니었다. 아마 정학은 무영이가 없었어도 그녀와 쉽게 사랑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경호원으로서 공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가 정학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무영이는 솔직했고 때로는 저돌적이었다. 그는 정학이의 약점을 직설적으로 지적할만큼 솔직했다. 이것이 무영이의 매력이었고 정학이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에게 허물이 없었다. 무영이의 이런 성격은 그녀 앞이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영이는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재치있게 해결해줬다. 그리고 결국은 제거되었어야 할 그녀 대신 송화가루 폭탄에 스스로 산화한다. 이런 무영이와 그녀의 마지막은 일종의 전설처럼 각색되어 대통령 경호원실에 남는다.

무영이는 정학에게 진심으로 사는 방법을 행동으로 알려준 친구였다. 중국어 통역사인 그녀에게 닥친 죽음 앞에서 무영은 행동하고, 정학은 고민했다. 모두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여 피해를 가장 최소화시켜야 한다는 정학과, 지켜야 할 가장 큰 가치를 위해 곧바로 행동해야 했던 무영은 잠시 대립한다. 결국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무영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그녀를 지키고 정학은 ‘남겨진 자’로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정학이는 무영이가 그리웠다. 정학이의 그리움은 무영이를 통해 알게 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질투나 고통이 아닌 온전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그래서 남겨진 시간 동안 함께 행동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정학은 하나와 수지가 푼 암호문 편지 속에서 드디어 무영과 해후한다. 여전히 그날, 그 시간에 살고 있는 무영에게 중년의 정학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미안한다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살아남은 그녀도 마찬가지다. 고마웠다는 말 대신 편지 속에 스며들어 있는 무영이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 전부다.
20년 만의 해후, 그리움으로 다시 만난 그들의 '그날들'

아마도 <그날들>이 2013 년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공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간 가객 김광석이 청년 무영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리움으로 다시 만난 그들에게 감사할 뿐.

(사진 제공: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