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태어난 곳에서 죽는다… 그것이야 말로 낙관의 원천
나는 식물을 제대로 길러본 적이 없다. 기르기는커녕 선물로 받았던 화분에 물을 과하게 줘서 죽여본 기억과 물을 지나치게 주지 않아서 죽여본 기억이 평생에 걸쳐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식물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하나 있다면 그건 엄마가 기르던 대파에 관한 장면이다. 그날 엄마는 찌개를 끓이기 위한 재료로 사 온 대파를 칼로 성둥성둥 썰어낸 뒤 남은 뿌리를 물이 담긴 접시에 담았다. 그렇게 두면 대파가 다시 자라난다고, 그런 식으로 대파값을 아낄 수 있다는 생활 정보를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했다. 나는 대파 한 단의 시중가도 잘 모르면서 그렇게까지 돈을 아낄 일인가 의아해하는 동시에 과연 저게 자라날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방금 제 몸의 거개를 잃고 뿌리만 남은 대파를 들여다보며 내가 대파라면 결코 자라나기를 선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파는 조금씩 자라났다. 한 달여 동안 꾸준히 생장하여 원래의 ‘대파’ 정도는 아니고 얼추 ‘중파’라고 불릴 만큼은 자라났다.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에(이번에도 찌개를 끓이기 직전에) 대파를 꺼내 칼로 성둥성둥 썰었다. 그리고 다시 뿌리를 물이 담긴 접시에 담았다. 나는 그쯤에서 대파가 자결하길 바랐다. 자결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성장은 멈췄으면 좋겠다고. 그렇지만 대파는 다시금 연녹색 잎을 틔워냈다. 한 달여 동안 ‘중파’는 아니고 ‘소파’라고 불릴 만큼은 자라났다.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대파를 꺼내 칼로 썰었다. 남은 뿌리를 마침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때 나는 대파가 평안이랄까 안식을 얻었으리라 생각했다. 더는 절단 나지 않을 수 있어서, 생장하지 않을 수 있어서 영면에 임했으리라 여겼다. 그러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인간의 관점에서 멋대로 이루어진 판단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식물은 태어난 곳에서 죽는다… 그것이야 말로 낙관의 원천
“가드닝을 하며 식물과 나는 생존의 드라마를 함께 겪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구성한 것일 뿐 사실 거기서 발생하는 상념들은 식물 자체와는 무관하다. 그 무관함, 발코니에서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무관함이라는 생각을 한다(224쪽).”

김금희 소설가의 『식물적 낙관』에서 이러한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지금껏 주변의 식물들에 내 사유와 감정을 투영하여 일종의 연민이랄까 대상화를 자연스레 해오지 않았나 싶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유지되고 생장이 계속되는 이유를 내가 다 알지 못”(151쪽)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협소한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재단하고 서사화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256~257쪽).”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대파에 관한 기억이 조금씩 변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파는 인간에게 착취당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대파의 삶을 살았을 뿐이라고. 대파의 생애에는 내가 어떤 식으로도 가늠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개입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희로애락이 있었으리라고. 그러니 앞으로는 어떤 삶도 섣불리 동정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