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종이 서류만 남고…내 실손보험금은 어디로 갔을까
최근 어깨 통증으로 며칠간 병원을 오갔다. 의사 진찰, 약 처방, 물리 치료를 받았지만 진료비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실손보험을 들어둔 게 있으니 내 돈은 거의 들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나 진료를 마치고 바쁘게 귀가하느라 증명서류 받는 일을 깜빡 잊었다. 큰돈이 아니다 보니 집에 와서는 서류 떼러 다시 병원에 가기가 너무 번거롭게 느껴졌다. 나중에 청구해야지 생각만 할 뿐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병원에서 종이로 된 증명서류를 일일이 발급받아 보험사에 직접 청구해야 하는 탓에 스스로 수령을 포기하는 보험금만 연간 3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실손보험 청구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도 80%에 육박한다.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사안인데도 어쩐 일인지 개선 작업은 더뎠다. 2009년 이후 14년째 국회에서 공전해온 보험업법 개정안이 지난 5월 드디어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했다. 환자가 요청하면 병원이 전산을 통해 보험사에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험 소비자의 권익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여야가 이 법안만큼은 대승적인 합의를 통해 통과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이제 국회 본회의까지 일사천리일까 싶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결국 의료계 반발이 가장 큰 변수다. 의료계는 “의료기관이 전산화된 진료 내역을 민간 보험사에 제공하면 보험사가 이를 활용해 보험 갱신 거절이나 보험료 인상 등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논리성과 개연성이 크게 부족하다.

이번 법안으로 달라지는 것은 진료 내역이 ‘종이’ 대신 ‘파일’에 담겨 제공된다는 것뿐이다. 추가로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종이로 인쇄해서 제공하면 문제가 없고, 파일로 주면 새로운 문제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모든 보험사로 전송되는 데이터가 중계기관에 모이면 해킹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런 내용을 반영해 데이터를 집적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됐다. 심지어 의료기관에 자료 전송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미국식 의료 민영화로 가는 첫 단계라는 황당무계한 얘기마저 나오는데 프랑스 등 공공 건강보장 체계가 확립된 유럽 선진국에서도 의료기관에서 전자치료 차트가 보험자에게 전송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번 법안의 핵심은 아날로그식 청구 방식의 수고로움을 덜고, 소비자의 요청만으로 의료기관에서 ‘클릭’만 하면 디지털 서류가 온라인으로 보험사에 곧바로 제출되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 환자와 소비자의 권익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보편적 상식이 구현된다는 의미가 크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하고 종이 낭비를 줄이는 등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수년 전부터 환경부가 탄소중립을 지원하기 위해 종이 영수증을 전자 영수증으로 대체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험금 청구에 쓰이는 불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줄어들면 그만큼 삶의 질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