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동 칼럼] 양심고백 필요한 '내로남불'의 이면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날마다 내 생각을 얼마나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바쁠 때 돌아봐주시길 바란다면 성가신가요 기쁜가요).’ 16세기 조선 명기 황진이가 지은 ‘소요월야(蕭寥月夜)’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한시다. 님을 그리는 여인의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가수 이선희가 1986년 발표한 히트곡 ‘알고 싶어요’의 가사가 떠오른다.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양인자 씨가 작사한 이 노래 가사는 한때 황진이의 한시를 번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소설 <토정비결>의 작가 이재운이 1995년 신문소설을 연재하면서 이 노래 가사를 원작자의 허락을 구한 뒤 한시로 번안해 실었던 것이다. 이재운 작가가 이런 사정을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지금도 인터넷에는 ‘소요월야’를 황진이의 한시라고 소개한 글이 수두룩하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탓에 한 번 퍼진 가짜뉴스를 바로잡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정치판을 달구는 작금의 내로남불 사례들에도 이런 류의 뒤섞임이 차고 넘친다.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고 말바꾸기가 횡행하면서 도대체 정당이나 정치인이 지향하는 가치가 있기나 한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정권 교체 후 여야 입장이 180도 달라지는 ‘공수교대형’ 말바꾸기는 누가 원조인지 찾기도 쉽지 않다. 안면몰수형 조변석개가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서다.

11일 국무회의 의결로 사실상 확정된 KBS 수신료 분리 징수안(방송법 시행령 개정)만 해도 그렇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KBS가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자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2003년 수신료 분리 징수를 골자로 한 방송법 개정안을 내놨다. 여당과 친여단체, 좌파 언론 등의 거센 반대로 분리징수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자 민주당과 좌파 언론 및 단체들은 수신료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또 공수가 교체됐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수신료 거부운동에 나섰고 더불어민주당은 “수신료 거부운동은 언론탄압”이라며 KBS 편에 섰다. 윤석열 정부의 수신료 분리 징수 방침에 대해 민주당은 ‘언론탄압’이라고 비판하지만 2017년 4월에는 박주민 의원 등 야당 의원 10명이 분리 징수를 요구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쯤 되면 명확하지 않은가. KBS의 공정성은 안중에도 없다. 내 편이냐 아니냐에 따라 공격과 수비가 정해질 뿐이다. 민주당은 20대 대선 패배 직후인 지난해 4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사장 선임 과정에서 정권 입김을 막겠다는 게 법안 취지다. 민주당은 야당이었던 2016년에도 비슷한 취지의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문재인 정부 내내 입법을 미뤘다. 대신 전 정부 때 임명된 공영방송 사장들을 쫓아내고 자기편 사람으로 채웠다. 그런데 야당이 되자 다시 방송법 개정에 나섰다. ‘내 편 방송’을 지키기 위한 민첩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민주당은 온갖 괴담을 퍼뜨리며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 땐 그렇지 않았다. 2021년 4월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국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에 따른다면 오염수 방류에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 여당 입장과 다른 게 없다. 당시 야당이었던 현재 여당은 떳떳할까.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2020년 10월 국회 외교통일위 국정감사에서 오염수가 방류 1~2년 후에 동해로 온다는 그린피스 등의 발표 내용을 인용하며 국제소송 등의 대응책을 주문했다. 2021년 4월에는 외통위 소속 국민의힘 의원 16명이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결정을 규탄하고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공동발의했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김기현 대표, 박진 외교부 장관 등이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은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의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관련 법안이 3건 발의됐지만 여당이던 윤석열 정부 출범 전까지는 손을 놓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도 여당일 땐 “신상털이는 안 된다”고 하다가 야당이 되면 딴소리를 한다. 상황이 변했다고 가치 판단이 바뀌나. 그때와 지금, 뭐가 달라졌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양심 고백들 좀 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