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도 느껴지는 가족사랑…침묵의 연극 'Birth'에 환호
소리내어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엄마의 눈빛에 담긴 사랑이나 힘겨워하는 친구를 껴안아주면서의 위로, 인생을 지탱해주는 사람을 잃고나서의 비통함 등이 그렇다. 때로는 표정이나 눈빛, 몸짓이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연극에서도 그렇다. 대사보다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이 극의 이야기와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얼마 전 우란문화재단 주최로 내한해 개막한 영국 극단 '시어터 리(Theatre Re)'의 '벌쓰(Birth·탄생)'는 언어보다 강한 비언어의 힘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시어터 리는 대사 없이 온전히 배우들의 몸짓으로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피지컬 시어터(신체극)를 전문으로 하는 극단이다. 국내에선 '네이처 오브 포겟팅' 등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런던 국제 마임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벌쓰'는 같은 해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해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할머니 수에서 어머니 캐서린, 어머니 캐서린에서 딸 에밀리로 3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가족의 이야기다. 임신 8개월 차인 에밀리가 우연히 할머니의 일기를 읽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배우들은 대사 없이 갓난아이부터 청소년, 노인까지의 생애 변화를 오로지 몸짓과 표정만으로 표현해낸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고,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기고, 나이 든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 등을 거치는 한 가족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를 상징한다.

연출을 맡은 기욤 피지 시어터 리 예술감독은 "이 작품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무의식적으로 전해지는 비밀과 그것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며 "관객들이 우리 인생과 부모, 그리고 조부모 삶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가족의 의미를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동작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이따금 대사가 있긴 하지만 거의 들리지 않는 일종의 효과음에 가깝다. 아이를 한 명의 성인으로 키우며 느끼는 환희와 고단함, 유산의 슬픔까지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한 감정들이 배우들의 몸짓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말 없이도 느껴지는 가족사랑…침묵의 연극 'Birth'에 환호
무대 전체를 뒤덮는 흰색 천을 활용한 연출이 눈에 띈다. 거대한 흰색 천이 물결치면서 무대를 덮고 지나갈 때마다 장면이 전환된다. 천의 파동은 마치 시간의 물결을 표현하는 듯하다. 흰 천이 지나가고 나면 나무 탁자는 부부가 누운 침대로 변신하고, 때로는 가족들이 앉는 식탁이 된다. 배우들이 흰 천 사이로 순식간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연출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음악도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흰색 천의 움직임과 배우들의 동작이 음악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움이 증폭된다. 특히 부드러운 피아노의 선율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천의 모습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감정의 절정 부분에서 더해지는 바이올린 연주는 입체감을 더한다. 공연 내내 반복적으로 수와 캐서린, 에밀리가 흥얼거리는 자장가 멜로디는 세대 간의 유대관계를 나타낸다.

공연이 끝나자 일부 관객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냈다. 말이나 글로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공연은 오는 9일까지 서울 성수동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