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11km 달리죠"…'휠체어 레이서' 청년 김강민씨
좋은 운동장’소속 육상선수 활동
학생 땐 늘 도움받던 존재
운동 시작하며 내면의 힘 길러
언젠가 사회적 기업 창업해
장애인의 독립 돕고 싶어
김씨가 타는 휠체어는 일반 휠체어보다 속도를 내기 좋게 되어 있다. '레이서'라고 부른다. 김강민씨 제공
김씨가 타는 휠체어는 일반 휠체어보다 속도를 내기 좋게 되어 있다. '레이서'라고 부른다. 김강민씨 제공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걸까. 생애주기별 ‘숙제’에 발목 잡힌 대한민국 청년들. 대입, 취업, 연애, 결혼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낙오된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그 어디서도 말할 수 없었던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검게 그을린 피부 탓에 팔뚝의 잔근육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최근 열린 체육대회 ‘던지기’ 종목에서 4등을 했다는 김강민(21)씨는 상장을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강민씨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뇌수막염을 앓았고, 태아를 받는 의사가 강민씨를 땅에 떨어뜨리면서 그는 뇌병변 장애까지 얻게 됐다. 평생 휠체어를 다리 삼아 이동해야 했다.

학창 시절, 강민씨는 어딜 가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짐을 들어달라거나, 물건을 가져다 달라거나,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가달라고 늘 부탁해야 했다.

장애인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한없이 고민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부모님은 강민씨에게 운동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도 운동을 통해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한 후 차츰 힘이 붙는 게 느껴졌다. 신체의 힘을 기르며 내면의 힘도 다져갔다.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내성적이었던 성격도 조금씩 변해갔다.

강민씨는 이제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른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어주고 싶다. "서울숲 근처 한강 산책길을 따라 휠체어를 타고 달리며 언젠간 그런 사람이 돼 있을 먼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고 그는 말했다.
운동선수 김강민씨가 한강변을 따라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다. 김강민씨 제공
운동선수 김강민씨가 한강변을 따라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다. 김강민씨 제공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좋은 운동장’이라는 장애인 육상팀 소속 육상선수 김강민(21)입니다. 주 종목은 11㎞ 레이싱입니다. 최근에는 '포환던지기'라는 종목에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11㎞면 거의 마라톤이네요. 근육을 많이 단련해야 할 것 같은데, 하루 운동량은 얼마나 되나요?
"운동이 제 직업입니다. 저희 팀 동료들끼리는 매일 회사로 '출근'한다고 표현합니다.

훈련은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진행되는데요, 실내에선 간단하게 몸을 풀고 아령과 각종 웨이트 도구를 활용한 근력 운동합니다. 그런 다음 한강변을 따라 휠체어를 타고 달립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땐 회사가 있는 서울 성동구 왕십리 인근에서 집까지 약 16㎞ 거리를 휠체어로 가기도 해요. 자주 다니지는 않아요. 훈련이 끝나고 나면 진이 다 빠져 있거든요."

▷휠체어 종류가 다양하다고 들었어요. 시합에 참가할 때 타는 휠체어가 따로 있나요?
"시합용 '레이싱 휠체어'가 따로 있습니다. ‘레이서’로 줄여 부르기도 합니다. 큰 바퀴 두 개로 움직이는 일반 휠체어와 달리 레이싱 휠체어는 큰 바퀴 두 개와 작은 바퀴 한 개로 만들어졌어요. 또 휠체어를 추진시키는 부분을 ‘핸드림’이라고 하는데, 레이싱 휠체어의 경우 개인의 체격과 취향에 맞게 제작할 수 있어요."
김씨는 서울 성동구에 있는 훈련장소에 매일 '출근'한다. 근력 운동을 쉬지 않기 위해서다. 김강민씨 제공
김씨는 서울 성동구에 있는 훈련장소에 매일 '출근'한다. 근력 운동을 쉬지 않기 위해서다. 김강민씨 제공
▷운동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식단 조절이 제일 고통스러워요. 밥과 반찬이 있는 식사는 하루에 한 번만 할 수 있고, 나머지 끼니는 단백질, 샐러드, 셰이크로 해결해야 해요. 레이싱은 시간 단축이 핵심인 스포츠여서 체중이 중요합니다. 먹는 게 적은데도 운동할 때 힘을 쥐어짜내야 하는 게 쉽지 않죠. 격투기나 레슬링 선수들이 계체를 통과하기 위해 몸을 말리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속도를 내려면 몸이 가벼워해서 코치님들도 저희 선수들 식단을 철저하게 관리하십니다.
엊그제 대회가 끝나서 열흘 간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휴가 기간에는 원하는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배 터지게 먹으려고요.

훈련에 복귀하면 열심히 훈련해서 다시 좋은 기록 내야죠."

▷운동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부모님의 권유로 중 2학년 때부터 운동선수 생활을 했어요. 부모님께선 제가 몸 쓰는 활동을 하면 성격도 더 활발해질 것이라 기대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내성적이었고, 친구가 많지 않았거든요. 제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도 없었어요. 아무래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활동에 제약이 많으니까요."
연습을 위해 회사가 있는 왕십리에서 집까지 휠체어로 돌아올 때도 있다. 김강민씨 제공
연습을 위해 회사가 있는 왕십리에서 집까지 휠체어로 돌아올 때도 있다. 김강민씨 제공
강민씨는 운동이 자신의 유일한 놀이라고 했다. 하교 후 친구들을 따라 PC방이나 놀이터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턱이 있거나 경사가 진 곳을 지나야 할 때면 휠체어를 타는 강민씨는 친구들에게 '짐'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친구가 초등 4학년 때 생겼다. 장애인인 자신도 비장애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해준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친구의 어머니를 마주쳤다. 친구 어머니는 더 놀고 싶다는 아이들의 요청을 세차게 거절했다. 강민씨는 그 어머니가 뒤돌아서면서 친구에게 하는 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너 쟤랑 놀지 마. 네가 뭐가 아쉬워서. 너도 그러다 쟤처럼 돼.”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기엔 모진 말이었다. 그렇게 호기심을 갖고 다가와 준 친구들마저 떠나갔다.

▷학교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운동이 강민씨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어릴 때부터 쭉 비장애인들이 있는 일반 학교를 다녔었어요. 세상에 잘 녹아드는 연습을 하라는 의미에서 특수학교가 아닌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 학교로 부모님이 보내신 건데, 오히려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 간극은 좁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날마다 좌절했어요.

매일 아침 선생님은 ‘강민이 전담 마크할 사람’ 손들라면서 한 명을 정해요. 제 별명이 자판기였어요. 제 짐을 들어주거나 다른 교실로 안전히 데려다주는 대가로 반 친구들은 칭찬이나 작은 선물을 보상으로 받았거든요. 늘 ‘도움의 대상’이 되는 게 가장 큰 불만이었어요.

운동하면서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조금씩 소화해내곤 했습니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요, 강민씨는 평소 어떤 진로를 꿈꿔왔는지 궁금합니다.
"중학생 때는 휠체어 레이싱 국가대표로 패럴림픽에 나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깨가 탈골돼서 잠시 운동을 쉬어야 했었죠. 아버지도 장애인이 체육으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냐며, 내심 제가 다른 진로를 택하길 바라셨던 때였기에 부상을 핑계로 운동하지 말라고 하셨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사회복지학을 배워서 저와 비슷한 장애인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지센터 등에선 장애인들이 장애인 활동가들을 선호하지 않아서 현장실습을 한 번도 못 갔어요. 제가 선택한 전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좋은 운동장'에서 다시 손을 내밀어주셔서 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원래 제 모습을 되찾은 것만 같아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요?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저 이 일을 지속해서 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그리고 언젠가는 저도 지금 제가 속해 있는 ‘좋은 운동장’과 같은 사회적 기업을 창업해서 장애인의 사회적 독립을 지원하고 싶어요."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