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닉, 러시아 공습 피해 연습…폐허 된 산불 피해지서 희망 노래
"삶은 지속하고 있고, 좋은 건 악을 이긴다…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포격 공포 속 울린 평화의 선율…강릉 찾은 우크라이나 합창단
"강릉 산불 이재민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곳에 음악으로 희망을 전달하고 싶어요.

"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폭삭 주저앉은 건물과 앙상하게 드러난 철골조 위로 따스한 위로의 노랫말이 내려앉았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에 건네는 위로는 슬프고도 혼혼하다.

지난 4월 화마(火魔)가 휩쓴 강릉 경포해변 일대에서 3일 우크라이나 보그닉 소녀합창단(Girls Choir "Vognyk")은 평화와 희망을 노래했다.

합창단이 선보인 대표곡 '봄'은 그을린 땅 위에 움튼 새 생명처럼 생기가 넘친다.

'불'을 의미하는 '보그닉'은 아이러니하게 불에 타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진 곳에서 화재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보그닉 합창단의 지휘자 올레나 솔로비(Olena Solovei)는 "우리 역시 힘든 시기를 겪고 있기에 산불 이재민들도 얼마나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지 어렴풋이 짐작한다"며 "하지만 삶은 지속하고 있고, 좋은 건 악을 이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릉 산불로 피해를 본 이재민에게 정신적인 지원이 되고 싶다"며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단원들의 노래를 감상하던 최양훈 강릉산불 비상대책위원장은 "원상 복구가 힘든 상황이지만, 먼 곳에서 강릉까지 와서 위로해주니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포격 공포 속 울린 평화의 선율…강릉 찾은 우크라이나 합창단
서로의 목소리에 기대 감미로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38명의 소녀 합창단의 얼굴에는 전쟁의 아픔보단 여느 소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손뼉 치는 두 손은 곧 악기가 되고, 서로 마주한 두 눈에는 싱그러움이 넘쳤다.

그러나 이들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970년대에 창단돼 세계를 투어하는 팀인 보그닉 합창단은 전쟁 이후 키이우에서 미사일 공격을 피해 어렵사리 노래 연습을 이어왔다.

매일 귓가에는 공습 경보음이 울렸고, 전쟁 포격으로 인한 두려움은 어느새 일상이 됐다.

단원들은 연습실이 있는 건물 지하 대피소에서 몸을 피해 있다가도 경보음이 잦아들면 건물 위로 올라가는 등 모였다 흩어지길 반복했다.

대피소에서 짧게는 30분, 길게는 3시간까지 폭격을 피해 숨어 있어야 했다.

단원 중 4명은 가족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어 경보음에 가슴 한켠이 '철렁' 내려앉는 일도 다반사였다.

수십명의 단원이 한 공간에서 화음을 맞춰보는 일만큼이나 한국으로 오는 과정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포격 공포 속 울린 평화의 선율…강릉 찾은 우크라이나 합창단
지난달 29일 전쟁 포격 속에서 단원들은 수도 키이우에서 버스로 16시간을 이동해 폴란드 국경을 넘은 뒤 바르샤바에서 다시 13시간을 비행한 끝에 1일 한국에 도착했다.

익숙지 않은 한국 음식과 연일 이어지는 더운 날씨 그리고 팍팍한 일정까지 소화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이들 합창단의 노래 열정만큼은 그 어떤 참가자들보다도 뜨겁다.

전쟁이 일상을 앗아간 이들에게 음악은 노래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올레나 솔로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자 전쟁에서 분연히 일어난 대한민국에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릴 평화를 노래하고 싶다"고 말했다.

단원 소피아도 "음악은 우리에게 희망 그 자체"라며 환히 웃었다.

보그닉 합창단은 이날 2023 강릉세계합창대회 개막식을 비롯해 5일 축하콘서트(강릉아트센터), 6일 우정콘서트(경포해변 야외공연장), 13일 폐막식(강릉아레나) 무대에 오른다.

대회는 오는 13일까지 강릉아레나, 강릉아트센터 등에서 열린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