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의 본고장이자 중심에서 그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는 동안 우리는 차라리 한국 사람임을 잠시 잊어야 그들의 리그에 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인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우리의 방식을 적용하고 접목해도 좋은 시대가 왔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도, 바라는 바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꿈 같은 일인가.

소프라노 임선혜의 ‘아리아’

마루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

또 마을회의다. 부동산 업자가 뒷산에 주택 분양사업을 하니 대책을 마련하자는 안건이었다. 그건 그렇고 마룻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리에 피가 안 통했다. 재즈 트럼피터 쳇 베이커의 ‘In A Little Provincial Town(작은 시골 마을에서)’이 생각났다. 지루한 전개에 답답한 멜로디로 이런 상황에 딱 맞는 곡이다.

재즈평론가 남무성의 ‘재즈와 커피 한잔’

미국에 가는 '한국 60·70년대 실험미술'

[오늘의 arte 칼럼] 세계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달라졌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는 폐막 후 미국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미술관과 로스엔젤레스(LA) 해머미술관에서 순회 전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한 시대가 미국 메이저 미술관에서 소개된다는 건 한국 대중문화와 클래식에 이어 미술까지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