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역사 찾아 대구로…"카잘스·번스타인이 보낸 편지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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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발전소 3층에 있는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
예술가들이 남긴 자료 수집·공개
"6·25전쟁의 상흔 음악으로 치유"
1963년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거장들 서명 담긴 축하편지 눈길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
예술가들이 남긴 자료 수집·공개
"6·25전쟁의 상흔 음악으로 치유"
1963년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거장들 서명 담긴 축하편지 눈길
“대구교향악단 창단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교향악단은 한국에 있는 음악가들, 음악 애호가들을 비롯해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과 문화적 충만함을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음악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소통되는 신비로운 언어이며, 모든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신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현대 ‘첼로의 아버지’ 파블로 카살스(1876~1973)가 대구방송교향악단(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 창단 연주회를 축하하며 보낸 편지의 일부다.
대구예술발전소 3층에 위치한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에 가면 파블로 카살스의 친필 사인이 적힌 편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과 피에르 몽퇴가 보낸 전보를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3년 2월은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창단을 한 해 앞둔 때였다. 1960년대 초반,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대구에서 교향악단이 창단되고,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축하 편지(전보)까지 보냈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이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하던 때 대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편지가 왔을까.
대구역에 내리면 차로 5분,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대구예술발전소 3층에는 박물관과 도서관 예술기록관을 겸한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인 ‘열린수장고’가 있다.
대구 근대와 전후(戰後)의 음악과 미술을 만나는 공간이다. 전쟁과 배고픔 속에서도 예술을 향유했던 당시 대구 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기홍(1926~2018) 대구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를 비롯한 당대 음악가들은 6·25전쟁 시기부터 교향악 운동에 뛰어들었다. 음악으로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7년 대구현악회를 창단하고 그 성공에 힘입어 1957년 12월 대구교향악단을 창단했다. 하지만 자금난에 허덕여야 했다. 1958년 규모를 축소해 대구관현악단으로 변모시켰지만 어려움은 계속됐다. 이들은 1962년 설립된 대구방송국(KBS대구방송의 전신) 사장을 설득해, 연습공간과 공연장 등의 후원을 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정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단체로 자리 잡으려면 사람들의 관심이 더 필요했다.
이들이 생각한 방법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세계 무대에 이름난 음악가들의 연락처를 일일이 찾아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소식을 알렸다.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뭉친 이들의 진심이 국경을 넘어서도 통했던 것일까. ‘그들’이 일제히 회답해온 것이다. 명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피에르 몽퇴, 유진 오르먼디, 스토코프스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안익태, 그리고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등이 그들이다. 대부분의 음악가가 짧은 축하 전보를 보내왔지만, 당시 80대 후반이었던 카살스는 친필사인까지 넣어 특별히 한 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80대 후반의 첼리스트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작은 도시의 오케스트라 창단 소식에 정성이 담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카살스는 공연 날짜에 맞춰서 편지가 도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문구까지 덧붙였다. 카살스의 이름 앞에는 항상 ‘휴머니즘’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카살스의 조국은 에스파냐 왕정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부단히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카탈루냐다.
카살스의 편지는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연주회가 끝나고 한 달가량 뒤에야 도착했지만, 그 편지를 받은 대구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엄청난 확신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 그리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의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음악의 힘, 예술의 힘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대구시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1964년 12월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됐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과 부산관현악단, KBS교향악단에 이어 국내 국공립 교향악단으로는 네 번째다.
유네스코 음악 창의 도시 대구를 빛낼 만한 이런 귀한 자료와 스토리는 하마터면 아무도 모른 채 사장될 뻔했다. 하지만 대구시가 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을 펴고, 임언미 팀장 등이 작고 직전의 예술가와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기홍 지휘자는 임 팀장과의 생전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대구의 음악계는 교향악 운동을 하면서 오로지 음악 발전만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음악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회고했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는 그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 나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는 이기홍 대구시향 초대 지휘자를 비롯해 대구 예술의 오늘을 일군 작고 예술(음악)가들이 남긴 자료들을 수집·공개해 대구가 유네스코 음악 창의 도시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꼼꼼히 되살피고 있다. 음악 외 여러 분야의 생존 원로예술가들의 육성을 채록하고 가치 있는 자료를 수집해 보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현재까지 6000여 점의 자료를 수집했고 그중 일부를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
현대 ‘첼로의 아버지’ 파블로 카살스(1876~1973)가 대구방송교향악단(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 창단 연주회를 축하하며 보낸 편지의 일부다.
대구예술발전소 3층에 위치한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에 가면 파블로 카살스의 친필 사인이 적힌 편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과 피에르 몽퇴가 보낸 전보를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3년 2월은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창단을 한 해 앞둔 때였다. 1960년대 초반, 6·25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대구에서 교향악단이 창단되고,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축하 편지(전보)까지 보냈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이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하던 때 대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편지가 왔을까.
○유네스코 음악 도시에서의 음악 역사 여행
주제를 찾아 나서고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는 개별 여행객들에게 유네스코 음악창의 도시, 대구는 또 다른 여행의 묘미를 가진 목적지다.대구역에 내리면 차로 5분,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대구예술발전소 3층에는 박물관과 도서관 예술기록관을 겸한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인 ‘열린수장고’가 있다.
대구 근대와 전후(戰後)의 음악과 미술을 만나는 공간이다. 전쟁과 배고픔 속에서도 예술을 향유했던 당시 대구 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기홍(1926~2018) 대구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를 비롯한 당대 음악가들은 6·25전쟁 시기부터 교향악 운동에 뛰어들었다. 음악으로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7년 대구현악회를 창단하고 그 성공에 힘입어 1957년 12월 대구교향악단을 창단했다. 하지만 자금난에 허덕여야 했다. 1958년 규모를 축소해 대구관현악단으로 변모시켰지만 어려움은 계속됐다. 이들은 1962년 설립된 대구방송국(KBS대구방송의 전신) 사장을 설득해, 연습공간과 공연장 등의 후원을 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정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단체로 자리 잡으려면 사람들의 관심이 더 필요했다.
이들이 생각한 방법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세계 무대에 이름난 음악가들의 연락처를 일일이 찾아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소식을 알렸다.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뭉친 이들의 진심이 국경을 넘어서도 통했던 것일까. ‘그들’이 일제히 회답해온 것이다. 명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피에르 몽퇴, 유진 오르먼디, 스토코프스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안익태, 그리고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등이 그들이다. 대부분의 음악가가 짧은 축하 전보를 보내왔지만, 당시 80대 후반이었던 카살스는 친필사인까지 넣어 특별히 한 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80대 후반의 첼리스트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작은 도시의 오케스트라 창단 소식에 정성이 담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카살스는 공연 날짜에 맞춰서 편지가 도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문구까지 덧붙였다. 카살스의 이름 앞에는 항상 ‘휴머니즘’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카살스의 조국은 에스파냐 왕정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부단히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카탈루냐다.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으로 세상에 알려져
임언미 대구시 문화유산과 문화예술기록팀장은 “약소 민족의 일원으로서 치열하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삶을 온몸으로 겪은 카살스에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과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던 한국의 음악가들이 보낸 SOS는 특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카살스의 편지는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연주회가 끝나고 한 달가량 뒤에야 도착했지만, 그 편지를 받은 대구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엄청난 확신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의 상처, 그리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의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음악의 힘, 예술의 힘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대구시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1964년 12월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됐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과 부산관현악단, KBS교향악단에 이어 국내 국공립 교향악단으로는 네 번째다.
유네스코 음악 창의 도시 대구를 빛낼 만한 이런 귀한 자료와 스토리는 하마터면 아무도 모른 채 사장될 뻔했다. 하지만 대구시가 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을 펴고, 임언미 팀장 등이 작고 직전의 예술가와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기홍 지휘자는 임 팀장과의 생전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대구의 음악계는 교향악 운동을 하면서 오로지 음악 발전만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음악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회고했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는 그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 나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는 이기홍 대구시향 초대 지휘자를 비롯해 대구 예술의 오늘을 일군 작고 예술(음악)가들이 남긴 자료들을 수집·공개해 대구가 유네스코 음악 창의 도시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꼼꼼히 되살피고 있다. 음악 외 여러 분야의 생존 원로예술가들의 육성을 채록하고 가치 있는 자료를 수집해 보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현재까지 6000여 점의 자료를 수집했고 그중 일부를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