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 이어 한국전쟁 이끈 유엔군사령관
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까지 미군 내 움직임 조명
미군의 시선으로 본 6·25…신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한국군은 혼란에 빠져있고, 정상적인 전투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

리더십도 부족했으며…. 그들은 전쟁에서 주도권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1950년 6월 29일 미국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한강 이남에서 전선을 살펴본 후 미국 합참에 보낸 메시지의 일부다.

전쟁이 발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군의 참패는 불 보듯 뻔해 보였다.

막강한 포병부대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노도와 같았다.

개성은 전쟁 발발 4시간 만에 북한군 수중에 떨어졌다.

이튿날에는 서울 외곽지역인 의정부까지 북한군이 밀려 내려왔다.

북한군이 서울 외곽에 도달하기 직전, 한국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과 지도부는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국군 육군본부도 미 군사고문단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시흥으로 거점을 옮겼다.

미군의 시선으로 본 6·25…신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객관적 전력에서 한국군은 북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북한은 전차, 트럭, 전용화기에다가 180대에 이르는 신형 항공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보병 수는 13만5천여명에 이르렀고, 그들을 지휘하는 노련한 간부도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서 장교로 복무했거나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며 야전을 밥 먹듯이 한 노장이었다.

반면 한국군은 탱크 한 대 없었고, 훈련받은 장교도 드물었다.

한국군의 기갑부대 수준은 몇 대의 정찰용 차량과 반 궤도식 차량이 전부였다.

미군도 철수해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만 한반도에 남아있었다.

한국군의 군세는 북한군에 견줘 이처럼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지만, 북한군은 그 상황에서도 만전을 기하고자 고도의 심리전까지 구사했다.

그들은 특수 부대원들을 피난민 대열에 합류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쟁 초반이지만 승부의 추는 이미 기울어 보였다.

맥아더가 한국군의 힘만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군의 시선으로 본 6·25…신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그렇게 맥아더가 한반도를 시찰하기 며칠 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 해군과 공군을 투입해 한국을 지원하라"고 군에 명령했다.

펜타곤(미국 국방부 청사)에 근무하던 리지웨이는 침대맡에 있는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는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짧게 지속했던 평화가 곧 끝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최근 번역 출간된 '리지웨이의 한국전쟁'(플래닛미디어)은 매슈 B. 리지웨이 장군이 쓴 한국전쟁 회고록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 후임으로 한국전쟁을 이끈 유엔군 사령관이었다.

책은 1967년 미국에서 출판됐고,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번역됐다.

저자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정전 협정까지의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일본에서 맛난 음식을 먹고 여자친구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 한국에 급파돼 첫 전투를 벌이며 본진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준 스미스특임부대, 맥아더의 천재적인 지략이 빛난 인천상륙작전, 북진하며 전력을 분산한 맥아더의 뼈아픈 패착, 맥아더와 그 부하였던 워커 장군의 불화, 전선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렸던 중공군의 나팔 소리,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과 치열한 고지전, 그리고 정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판문점의 모습까지를 책은 조명한다.

저자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미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에도 상당 부분 잘못 이해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했다"며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박권영 옮김. 356쪽.
미군의 시선으로 본 6·25…신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