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외계인이었을지도 몰라
THE COMING OF THE FAIRIES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요정이 실존한다고 믿었다. 코난 도일은 냉철한 이성을 강조하는 캐릭터로 홈즈를 그렸으면서도 말년에 이를수록 심령술과 신비한 존재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어린 소녀들이 찍은 요정 사진이 화제가 되었을 때, 그는 의심하기보다 감격하는 쪽에 섰다. 그리고 사건의 경위를 담은 책 <요정의 도래(THE COMING OF THE FAIRIES)>(1922)에서 요정이 존재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했다. 인간의 시각은 세상의 일부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가시광선 바깥에도 빛이 존재한다. 눈으로 포착하지 못하더라도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니 요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들만큼이나 번성한 다른 생명체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작 요정 사진을 찍은 당사자들은 요정을 믿지 않았다. 소녀들은 나이가 든 뒤, 자기들이 가짜 사진을 찍었다고 고백했다. 잡지에서 요정 그림을 오린 뒤에 카메라로 찍었다는 내용이었다. SF의 시대에는 요정의 자리에 외계인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합성사진을 만들어 외계인이나 미확인비행물체를 목격했다고 퍼뜨렸다. 또다시 믿음과 회의가 편이 갈렸다. 음모론과 유사과학과 오컬트가 뒤엉켰다. 심지어 외계인 신을 믿는 종교도 등장했다. SF 작가였던 론 허버드는 외계인이 신이라는 사이언톨로지를 창설했다. 과학적인 소설을 추구한다던 존 W. 캠벨은 그를 도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외계인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위 문장에서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함의를 읽는다. 현재 과학이 공표하지 않을 뿐 이미 그들의 존재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라는 말 옆에는 ‘유사과학적으로’가 있다. 그리고 유사과학은 다시 SF의 소재가 되었다. 작가들은 소설 밖으로 탈주한 외계인 신봉자들을 다시 소설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산화는 음모론과 유사과학을 솜씨 좋게 SF로 만드는 작가다. 이산화의 <뮤즈와의 조우>는 ‘그건 어쩌면 외계인이었을지도 몰라’라는 내용이다.

소설의 화자는 SF 작가다. 화자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한국의 창작 SF의 계보를 발굴하는 ‘레트로 SF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그러다 의외로 1990년대에 발간된 잡지에 SF 만화가 다수 실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도 만화 잡지가 아니라 전문지다. “구독자도 출판사도 거의 겹치지 않을, 그러니만큼 서로 영향을 크게 주고받지도 않았을 전문지 30여 곳에 일제히 SF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가 있었다니.”(248p) 그런데 만화에 묘사되는 외계인의 모습이 수상쩍다. 괴생물체를 실제로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표현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월간 정밀가공>에 실린 만화 <신입사원은 외계인>의 주인공 외계인의 모습은, 푸에르토리코에서 1995년에 목격되었다는 유명한 괴생물체 ‘추파카브라스(염소 피빨이)’와 완전히 겹친다. 정말로 이상한 점은, 목격담보다 만화가 먼저 연재되었다는 점이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전문지 만화를 참고하여 목격담을 만들어냈을 리는 없다. 반대로 만화가가 목격담을 예언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소설은 이런 수수께끼에서 외계인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

<뮤즈와의 조우>가 과거의 기록에서 외계인의 흔적을 더듬어간다면, 반대로 구병모의 <니니코라치우푼타>는 미래에서 시작한다. 작중 한국은 국민 중위연령이 61세가 된 초고령사회다. 인구의 절반이 61세 이상이다. 은퇴 연령은 69세지만 누구든 일할 수 있으면 일한다. 나이 들고 지친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데 익숙해졌다. ‘나’의 할머니 시대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꿈꿨지만, ‘나’의 시대 사람들은 그런 자동차가 만들어지더라도 상용화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이론과 기술은 이미 완성되었다. 하지만 예산과 자원과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 과거의 상상이 여전히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무엇도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놀라움은 평범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뭐가 됐든 인류에게 실제로 도착한 미래는 눈부심이나 편리함, 신비와는 거리가 있었고”(29p)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괴롭게 늙고 심상하게 세상을 떠난다. ‘나’는 “외계인 한두 팀이 지구에 불시착한들 임팩트 있는 이벤트 정도에 불과할 테며 삶이 획기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29p)을 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외계인을 찾는다. 어머니는 여든일곱이 넘어 치매로 요양병원에 있다. 한때 대학에서 교양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던 어머니는 딸의 얼굴도 몰라보는 치매 노인이 되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신이 아홉 살 때 만났다는 외계인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보고 싶다고 거듭 말한다. 쉽지도 않은 이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부르면서,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다행히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는 외계인의 얼굴을 만들 능력이 있다. 여태껏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하는 특수분장팀에서 일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를 꽉 깨물고 니니코라치우푼타의 마스크를 만든다.

두 소설의 결말은 비슷한 면을 공유한다. 어쩌면 외계인은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불가해한 존재이겠지만, 어쩌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뮤즈와의 조우>의 화자는 외계인 사건의 내막을 이렇게 추론한다. 외계인은 지구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모습을 취하기 위해서 만화가를 그래픽 디자이너처럼 이용했다. 그들은 만화가의 묘사대로 지구인에게 나타났을 것이다. 여기서 외계인은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지구인이 인식 가능한 형태가 되려고 연습하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외계인도 이름조차 발음하기 힘들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별로 상관은 없었어요. 우리는 둘 다 손이 있으니 마주 잡을 수 있고, 입이 있으니 웃을 수 있었거든요.”(31p)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중요치 않다. “외계의 언어를 우리의 사고 체계에 끼워 맞춰 이해하겠다는 것부터가 너무 오만”(30p)이다. 그리고 ‘나’는 외계인처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마음을 더듬어나간다. 이 소설에서 외계인은 존재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놀랄 일은 아니다. 구병모는 음모론에 불붙는 자들의 반대편, 기대와 감동이 꺼진 시대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다만 어머니의 방식대로 이야기된 외계인 목격담이 ‘나’에게 일으키는 효과는 충분히 놀랍다.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 이름이 유의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시광선 바깥의 빛을 감각하는 순간이다. 독자에게 평소와는 다른 빛을 선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SF는 불가능의 렌즈를 통과하여 내리쬐는 빛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