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물처럼 쓰는 ‘종이달’ 같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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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
<종이달>, 가쿠다 마쓰요 지음,
권남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종이달>, 가쿠다 마쓰요 지음,
권남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돈이 너무 많아서 온갖 것을 사들이는 사람이 요즘처럼 흔해 보이던 때가 있을까. 하지만 부자들은 소설 주인공을 꿰차는 경우가 많지 않다. 동명의 한국 드라마로도 인기를 얻은 일본 소설 <종이달>에는 마음도 형편도 궁핍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 이상한 지점에서 지름신과 접신한다. 꽤 절제하며 일상을 지내다가 갑자기 돈을 펑펑 쓰는 그 순간, ‘몰입’하는 만족감에 빠져든다.
나 혼자 뒤처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FOMO(Fear of Missing Out)의 청구서는 모범생을 기어코 찾아낸다. 회사원인 남편과도 잘 지내고 귀여운 아이도 있는 마키코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듯하다. 그러나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급 옷을 맞춰 입고 근사한 풍광으로 여행 다녔던 경험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높은 기준이 되었다. 집안 형편은 추락했지만 마키코는 아이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누렸으면 하고 바란다. 남처럼 되고 싶다는 기준은 그렇게 내면을 소진시켜 간다.
마키코의 FOMO는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매달 적잖은 돈을 옷값으로 썼던 날들을 떠오르게 한다. 사회 초년생에게 가벼운 돈이 아니었는데, 두고두고 입을 만한 번듯한 옷을 산 게 아니다. 유행한다는 스타일의 옷을 이것저것 사들였는데, 그렇게 일 년쯤 동대문에 가서 ‘짝퉁’ 옷을 그러모았다. 그때의 나는 남들보다 안목이 없다고 자책하기 일쑤였다. 스스로 선택해본 경험이 별로 없던 흔한 ‘모범생’이었다.
<종이달>의 주인공 리카에 비하면, 마키코의 소비는 아주 평범하다. 리카는 은행에서 거액을 횡령한다. 그녀는 사랑하게 된 이를 위해 대신 빚을 갚아주고 점점 더 많은 돈을 쓴다. 20대 남자는 가난한 영화감독 지망생으로 돌봐주고 싶은 불우한 소년에 가깝다. 그는 은행 영업자인 리카가 상대하는 악귀 같은 노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손자다. 어릴 적부터 리카는 가난한 아이들을 보면 도움을 주고, 친절과 선물을 베풀면서 기쁨을 느껴왔다. 돕는 일은 고귀한 일이다. 누구나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매일 회색 옷을 돌려 입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알뜰살뜰한 생활을 마다 않던 여성이 어느새 돈이 없으면 교감하지 못하고 돈이 주는 ‘만능감’에 중독되어 버렸다.
우정, 사랑, 감사…. 듣기에 아름다운 많은 덕목들이 돈으로 측정된다. 애인에게 사준 값비싼 시계일 수도 있고, 가족의 기념일에 분수 넘치게 건넨 두툼한 봉투일 수도 있다. 뒤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신이 좀스러워 보이고, 부도덕한 행동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리카가 보기에, 부촌의 VIP 정기예금 고객들은 리카를 환대한다는 의미로 거액의 예금을 선물하듯 맡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 성격도 모나지 않은 이들. 또는 그러리라 예상되는 이들. 리카와 마키코는 모두 자신을 위해서는 사치를 부리지 않고 살아왔다. 평소 절약과 절제가 몸에 밴 그녀들이 어떤 상황에서 점화되면 돈을 태우듯 써버려서 그 씀씀이가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아르바이트 직원에서 은행의 유능한 영업자가 된 리카는 이제는 고급 화장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입하고 피부 관리를 받으러 다닌다. 하지만 젊은 애인의 눈에 들기 위한 소비였을 뿐이다. 삼십대 중후반의 두 여자들은 매일 성실하게 살아왔고 남에게 함부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이다. 자기 욕구를 억누르는 편으로 살아왔고 꽤 상냥한 편이었다. 이들은 감정을 위해 소비라는 수단을 사용했던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음을 주고 베푸는 행위는 돈을 쓰고 물건을 손에 쥐어주는 행위다. 저자 가쿠다는 여성들이 돈을 속절없이 써버리는 대상을 아이 또는 아이 같은 애인, 나보다 약한 존재로 설정해두었다. 지켜주고 싶은 존재 앞에서 이성의 둑은 무너진다.
이 소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지금 돌이켜 보면 엉뚱한 물건에 돈을 낭비해버렸던 과거의 한때를 불러일으킨다. 왜 그렇게 많은 그림책을 사들였나. 서점 리뷰를 보니 나만 그런 회고에 빠진 게 아니다. 일본에서 안락한 한때를 뜻한다는 ‘종이달’. 소설 <종이달>의 곳곳에선 목표물을 포착해서 지갑을 열기까지 구매의 파노라마가 천천히 펼쳐진다. 무언가를 원해서 또는 그렇다고 착각하는 순간을 낱낱이 해부하는 작가의 간파력이 비범하다.
쇼핑을 할 때, 쾌락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또 외로움은 돈을 충동적으로 쓰게 만든다는 연구도 있다. 앞뒤를 살필 여력도 없이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다. 마음이 이사 나간 빈 집처럼, 작은 목소리에도 속이 텅 비어 웅웅 울리고 진동이 느껴질 때, 나를 채우거나 남에게 나눠줄 온기가 부족하다. 그런 때 마음은 쉽게 흔들리고, 미래를 살피기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대상을 찾게 된다. 좋거나 나쁘거나 몰입의 순간이다. 백화점 매장에는 자본주의의 미소가 준비되어 있고, 순식간에 손에는 종이 가방이 들리게 된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낀다. 아, 왜, 또.
나 혼자 뒤처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FOMO(Fear of Missing Out)의 청구서는 모범생을 기어코 찾아낸다. 회사원인 남편과도 잘 지내고 귀여운 아이도 있는 마키코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듯하다. 그러나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급 옷을 맞춰 입고 근사한 풍광으로 여행 다녔던 경험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높은 기준이 되었다. 집안 형편은 추락했지만 마키코는 아이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누렸으면 하고 바란다. 남처럼 되고 싶다는 기준은 그렇게 내면을 소진시켜 간다.
마키코의 FOMO는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매달 적잖은 돈을 옷값으로 썼던 날들을 떠오르게 한다. 사회 초년생에게 가벼운 돈이 아니었는데, 두고두고 입을 만한 번듯한 옷을 산 게 아니다. 유행한다는 스타일의 옷을 이것저것 사들였는데, 그렇게 일 년쯤 동대문에 가서 ‘짝퉁’ 옷을 그러모았다. 그때의 나는 남들보다 안목이 없다고 자책하기 일쑤였다. 스스로 선택해본 경험이 별로 없던 흔한 ‘모범생’이었다.
<종이달>의 주인공 리카에 비하면, 마키코의 소비는 아주 평범하다. 리카는 은행에서 거액을 횡령한다. 그녀는 사랑하게 된 이를 위해 대신 빚을 갚아주고 점점 더 많은 돈을 쓴다. 20대 남자는 가난한 영화감독 지망생으로 돌봐주고 싶은 불우한 소년에 가깝다. 그는 은행 영업자인 리카가 상대하는 악귀 같은 노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손자다. 어릴 적부터 리카는 가난한 아이들을 보면 도움을 주고, 친절과 선물을 베풀면서 기쁨을 느껴왔다. 돕는 일은 고귀한 일이다. 누구나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매일 회색 옷을 돌려 입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알뜰살뜰한 생활을 마다 않던 여성이 어느새 돈이 없으면 교감하지 못하고 돈이 주는 ‘만능감’에 중독되어 버렸다.
우정, 사랑, 감사…. 듣기에 아름다운 많은 덕목들이 돈으로 측정된다. 애인에게 사준 값비싼 시계일 수도 있고, 가족의 기념일에 분수 넘치게 건넨 두툼한 봉투일 수도 있다. 뒤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신이 좀스러워 보이고, 부도덕한 행동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리카가 보기에, 부촌의 VIP 정기예금 고객들은 리카를 환대한다는 의미로 거액의 예금을 선물하듯 맡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 성격도 모나지 않은 이들. 또는 그러리라 예상되는 이들. 리카와 마키코는 모두 자신을 위해서는 사치를 부리지 않고 살아왔다. 평소 절약과 절제가 몸에 밴 그녀들이 어떤 상황에서 점화되면 돈을 태우듯 써버려서 그 씀씀이가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아르바이트 직원에서 은행의 유능한 영업자가 된 리카는 이제는 고급 화장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입하고 피부 관리를 받으러 다닌다. 하지만 젊은 애인의 눈에 들기 위한 소비였을 뿐이다. 삼십대 중후반의 두 여자들은 매일 성실하게 살아왔고 남에게 함부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이다. 자기 욕구를 억누르는 편으로 살아왔고 꽤 상냥한 편이었다. 이들은 감정을 위해 소비라는 수단을 사용했던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음을 주고 베푸는 행위는 돈을 쓰고 물건을 손에 쥐어주는 행위다. 저자 가쿠다는 여성들이 돈을 속절없이 써버리는 대상을 아이 또는 아이 같은 애인, 나보다 약한 존재로 설정해두었다. 지켜주고 싶은 존재 앞에서 이성의 둑은 무너진다.
이 소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지금 돌이켜 보면 엉뚱한 물건에 돈을 낭비해버렸던 과거의 한때를 불러일으킨다. 왜 그렇게 많은 그림책을 사들였나. 서점 리뷰를 보니 나만 그런 회고에 빠진 게 아니다. 일본에서 안락한 한때를 뜻한다는 ‘종이달’. 소설 <종이달>의 곳곳에선 목표물을 포착해서 지갑을 열기까지 구매의 파노라마가 천천히 펼쳐진다. 무언가를 원해서 또는 그렇다고 착각하는 순간을 낱낱이 해부하는 작가의 간파력이 비범하다.
쇼핑을 할 때, 쾌락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또 외로움은 돈을 충동적으로 쓰게 만든다는 연구도 있다. 앞뒤를 살필 여력도 없이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다. 마음이 이사 나간 빈 집처럼, 작은 목소리에도 속이 텅 비어 웅웅 울리고 진동이 느껴질 때, 나를 채우거나 남에게 나눠줄 온기가 부족하다. 그런 때 마음은 쉽게 흔들리고, 미래를 살피기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대상을 찾게 된다. 좋거나 나쁘거나 몰입의 순간이다. 백화점 매장에는 자본주의의 미소가 준비되어 있고, 순식간에 손에는 종이 가방이 들리게 된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을 느낀다. 아, 왜,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