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 '산조' 2년만에 재공연…"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현대적"
패션부터 영화·컨설팅·공연 등 전방위 활약…"드라마 대본 작업 도전"
'전통무용계 미꾸라지' 정구호 "한국의 미는 불균형·비대칭"
"우리나라의 예술 작품은 정형화돼 있지 않아요.

외국에서 말하는 '밸런스'가 없죠. 불균형하고 비대칭적이고, 불협해요.

모든 나라가 완벽을 '미(美)'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서 만들어지는 불균형의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생각해요.

"
패션디자이너로 유명한 정구호(58)는 이제 공연계에서 '흥행 보증수표'라고 불린다.

그가 연출한 '단'(2013), '묵향'(2013), '향연'(2015), '산조'(2021), '일무'(2022) 등 전통무용에 현대적인 감각을 입힌 작품들은 매번 신선한 충격을 주며 화제를 일으켰다.

이 가운데 초연 2년 만에 이달 23∼25일 국립극장에서 재공연을 올리는 국립무용단의 '산조'는 정구호 스스로 "가장 현대적"이라고 평가하는 작품이다.

지난 15일 국립극장에서 만난 정구호는 "'산조'는 저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라며 "이전까지는 전통을 답습한 다음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표현했다면 '산조'는 전통을 베이스로 창작을 한 작품이다.

전통을 가장 많이 진화시킨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어 "(총 3막9장 중) 전통에 대한 에센스는 1막1장의 여성 무용수 솔로 부분 한 장면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전통을) 재해석했다.

음악도 무대도, 의상도 가장 현대에 가깝다"며 "제 공연을 하나도 빠짐없이 본 분들도 '제일 긴장감 있다', '가장 현대적이다'라는 반응을 내놓는다"고 덧붙였다.

작품의 제목 산조(散調)는 전통음악으로 다양한 장단이 모이고 흩어지는 기악 독주곡이다.

연주자의 기량에 따라 변주할 수 있어 서양의 재즈에 비견되곤 한다.

'산조'는 이런 즉흥적이고 불규칙한 음악을 춤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산조는 음악 안에서 매우 많은 변화가 일어나요.

화성학 기준에 맞지 않은 게 불규칙적이죠. 연주하는 사람마다, 악기마다 달라져요.

산조를 들면서 이런 독특함이 한국의 정서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불규칙하고 불협한 화음 속에서 묘한 하모니를 만들거든요.

이게 한국 전통의 핵심이죠."
'전통무용계 미꾸라지' 정구호 "한국의 미는 불균형·비대칭"
'산조'는 1막 '중용'에서 비움·절제를, 2막 '극단'에서는 불균형 속 균형을, 3막 '중도'에서는 새로운 균형을 보여준다.

전통음악 산조의 구성에서 따온 것이다.

정구호는 "처음에는 한국무용의 키워드인 '정중동(靜中動)', 이후 자진모리부터 휘모리까지 여러 장단이 나오는 불협, 그 불협 속에서 새로운 하모니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지만, 끊임없이 변화나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모니 만들어내지 않나"라고 말했다.

'산조'는 초연 때 무대 연출이 실험적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1막에서는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거대한 바위, 2막에서는 회전하는 세 개의 삼각모형, 3막에서는 부드러운 수묵화가 담긴 원형 LED 패널이 등장한다.

이 오브제들은 재공연 때도 그대로 나온다.

정구호는 "1막의 바위는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전통)을 형상화한 것이다.

다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움직이도록 해 시간과 사회의 변화를 표현했다"며 "2막 삼각형은 뾰족뾰족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줘서 불안감을 조성하고, 3막은 새로운 형태로 안정감을 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대 연출은 '불안한 분위기' 포인트였다.

산조 자체가 균형이 맞는 듯 안 맞는 듯 그 중간을 아슬아슬 가는 것이다 보니 관객들이 긴장감 있게 공연을 봤으면 했다"고 말했다.

"저는 정말 전통을 좋아해요.

그래서 한국무용도 시작하게 됐죠. 하지만 이걸 그대로 답습하는 데서 끝나면 의미가 없잖아요.

이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진화시켜, 가장 현대적인 모습으로 보여드리는 게 제 목표예요.

'산조'는 1부터 10까지 있다고 하면 7 정도죠. 어느 날 10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되면 제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10에 대한 구상은 이미 다 있어요.

제가 하는 마지막 실험이죠."
'전통무용계 미꾸라지' 정구호 "한국의 미는 불균형·비대칭"
이처럼 끊임없이 실험과 도전으로 전통을 재창조해 온 정구호는 스스로를 '전통무용계 미꾸라지'라고 칭한다.

그는 "어느 장르든 변화하기는 어렵다.

너무 많은 룰(규칙)을 배우고, 익히고, 완성해온 분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나도 패션계에서는 마찬가지"라며 "저는 다른 장르에서 왔으니 미꾸라지처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저렇게 하면 어때요?'라고 던질 수 있다.

새로운 제안이 좋든 나쁘든 '이렇게도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전통무용계에서는 미꾸라지라지만, 사실 정구호는 패션은 물론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거물'로 통한다.

롯데백화점 본관 재개관 디자인 총괄, 리움·호암 미술관 리뉴얼 총괄, 공예트렌드페어 총감독 등 화려한 약력을 자랑하는 전방위 아티스트다.

그런 그가 최근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고 했다.

바로 드라마 대본 작업이다.

정구호는 "올해부터 직업을 바꾸려고 마음먹었다.

원래 영화, 드라마에 관심이 많았고, 써놓은 시놉시스도 다섯개 정도"라며 "아직 오픈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금은 제작사 의뢰를 받고 드라마 대본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창작 자체가 너무 좋아요.

일하는 과정에서 어떤 허들도 없이 자유로울 수 있죠. 저에 대한 평가 중 '실험적'이라는 단어가 제일 좋아요.

글을 쓰는 건 너무 어렵지만, 전력 질주해야죠. (웃음)"
'전통무용계 미꾸라지' 정구호 "한국의 미는 불균형·비대칭"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