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 있는 테니스 경기장 ‘스타드 롤랑가로스’. 12일(한국시간) 노바크 조코비치(36·세르비아)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있는 숫자 23을 가리켰다. 23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온 재킷이었다.

조코비치가 남자 테니스 역사를 새로 썼다. 이날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에서 카스페르 루드(25·노르웨이)를 제압하며 23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라이벌인 라파엘 나달(37·스페인)을 제치고 따낸 남자 선수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이다.

조코비치는 이날 세트스코어 3-0(7-6<7-1>, 6-3, 7-5) 완승을 거뒀다. 첫 번째 세트에선 자신보다 11살 어린 루드를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루드는 클레이코트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 나달의 뒤를 잇는 ‘차세대 흙신’으로 불리는 신성이다. 클레이코트에서 열리는 프랑스오픈은 그래서 루드에게 유리하다는 관측이 많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그랬다. 루드가 네트 쪽으로 빠르게 쏴 올린 스트로크를 잇달아 놓치면서 조코비치는 1세트 초반 1-4로 밀렸다.

조코비치는 위기에 강한 남자였다.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해 기울어졌던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놨다. 타이 브레이크부터는 조코비치의 독무대였다. 7-1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고 2·3세트도 접전 끝에 이겼다. 강력한 포핸드 샷으로 우승을 확정 짓자 조코비치는 라켓을 집어던지고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조코비치는 테니스 역사를 새로 썼다. 이번 대회 최대 관전포인트는 처음부터 조코비치의 우승 여부였다. 프랑스오픈에서만 총 14번 우승한 ‘흙신’ 나달이 엉덩이 부상으로 불참하면서다. 나달과 조코비치는 ‘황제’ 로저 페더러(42·스위스)와 함께 남자테니스 ‘빅3’ 시대를 이끌어온 라이벌이다. 나달과 조코비치는 이번 대회 전까지 메이저대회 통산 22회 우승으로 역대 공동 1위에 올라 있었다.

지난해 윔블던과 올초 호주오픈까지 두 개 메이저대회를 연달아 따낸 조코비치였지만, 그의 우승 가능성을 크게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올초 호주오픈 후 오른쪽 팔꿈치 부상이 재발하면서 컨디션이 저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회가 시작되자 조코비치는 펄펄 날았다. 강철 체력에 젊은 선수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이번 대회 7경기의 상대 중 절반이 넘는 4명은 조코비치보다 12살 이상 어렸다.

조코비치는 이번 우승으로 ‘빅3’ 시대의 마지막 승자가 됐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페더러와 개성 강한 나달에 비해 조코비치는 ‘한 방이 없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이번 신기록으로 모든 걸 만회했다. 세 사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페더러는 지난 시즌 은퇴했고 나달은 엉덩이 부상으로 출전을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

조코비치는 아직 최상의 경기력을 보이고 있다. 글루텐 없는 음식과 채소만 먹는 철저한 식단 관리, 매일 요가와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 20대 선수에 못지않은 유연성을 지키고 있다. 어린 시절 폭격이 난무하는 세르비아에서 자라며 다진 단단한 멘털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제 관심은 조코비치가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지에 쏠리고 있다. 올해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을 접수한 만큼 윔블던과 US오픈만 우승하면 된다. 조코비치는 2021년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을 앞두고 US오픈 결승에서 메드베데프에게 패한 바 있다. 조코비치 역시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그는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