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미국 생활… 저녁을 못 얻어먹고 며칠을 울었다
1969년 봄, 나는 혼자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가게 되었다. 바이올린계의 대부였던 이반 갈라미안(Ivan Galamian) 선생님이 제자로 받아주셔서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사사하게 되었다. 갈라미안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선생님의 여름 음악캠프였다.

내 나이 열세 살, 정말 힘들게 뉴욕주에 있는 메도우마운트(Meadowmount) 캠프에 도착했다. 그때 내가 가져간 짐은 큰 여행백 하나와 바이올린이 전부였다. 내가 그때부터 6주간 지내게 될 방 안에는 시트, 이불 없는 침대 하나와 옷 서랍장이 전부였다.

그때 내 또래의 한 여학생이 다가와 다정하게 인사하며, 시트는 어디서 가져오고 식당과 화장실은 어디인지 필요한 정보들을 알려줬다. 덕분에 막막했던 마음을 떨치고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았다) 이 친구는 이후 나의 평생 친구가 된 유명한 여지휘자 마린 알삽(Marin Alsop)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반클라이번 콩쿠르 본선 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할 때 눈물을 흘린 바로 그 지휘자이다. 뉴욕에 사는 이 친구는 주말이면 자기 집에 초대해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미국에서 혼자인 나에게 외로움을 덜 느끼게 해준 고마운 친구이다.
나홀로 미국 생활… 저녁을 못 얻어먹고 며칠을 울었다
캠프에서의 절박감은 대충 극복했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가족, 지인 한 명 없는 나는 뉴욕으로 가게 되면 어디서 생활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갈라미안 교수님 한 분 믿고 막내딸인 나를 그 험난한 유학길로 보내놓고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상상이 된다. 다행히 갈라미안 교수님의 조교 중 한 분이 집에 학생을 위한 하숙방이 있다고 해서 저를 그곳에 맡기셨고, 그때부터 3년 동안 이 조교 선생님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선생님이 바로 마가레트 파디(Margaret Pardee) 선생님이다.

파디 선생님과의 인연은 정말 각별하고 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던 같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과의 3년이 너무도 힘들었지만, 그 시절에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호된 첫 캠프를 마치고 선생님 댁으로 이동해 뉴욕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뉴욕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은 거기서 지내면서 주말마다 선생님과 함께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파디 선생님은 자녀가 없어서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돌봐주셨다. 늘 자상하셨지만 연습 시간에 대해서는 정말 엄격하셨다. 하루 4시간, 주말은 토·일요일을 합쳐 4시간을 꼭 지켜야만 했다. 언젠가 학교에서 돌아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잠깐 누웠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저녁 시간을 넘겼고 결국 굶은 적이 있었다. 당시는 그 상황이 너무 서러워서 며칠을 눈물 흘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어린 시절 남다른 연습량과 훈련이 없었다면 성인이 되어 힘든 연주가의 여정을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내 평생의 은인 중에 마가레트 파디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스승이자 멘토이다. 나 또한 대를 이어 다음 세대의 꿈나무들이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잡고 계보를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