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를 축조하는 작업, 어쩌면 사라지고 없는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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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주의 탐나는 책
<비동맹 독본> 서동진, 박소현 엮음
<비동맹 독본> 서동진, 박소현 엮음
<비동맹 독본> 서동진, 박소현 엮음
방대한 혹은 딱히 방대하진 않더라도, 어떤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단어 사전을 만들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했다. 보통의 사전들처럼 단어들을 무작위로 쌓아 올리고 모든 것을 아카이빙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어들에 당파적인 색채를 입히고 맥락화해 특정한 세계를 지어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무너진 세계, 그러나 다시 있길 바라는,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그런 것이라면 더욱 좋으리라. 그렇다면 단어들로 사전을 만드는 일이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너무 거창하게 들리지만, <비동맹 독본>이 그러한 상상에 다가간 책이라 생각했다. <비동맹 독본>은 비동맹운동(Nam: Non-Aligned Movement)과 관련된 78개의 항목에 대해 14명의 필자가 풀이한 짧은 에세이들로 구성된 일종의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시작된 냉전 질서는 신생국들에게 미국과 소련 중 한 진영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식민주의에서 막 벗어난 신생국 다수는 신식민주의적으로 보이는 조약이나 동맹에 가입하길 주저하며, 다른 방식의 연대, 국제주의를 내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비동맹운동이었다.
각 글은 비동맹운동과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 기구 등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과 의미를 맥락화하는데, ‘반둥회의’ ‘민족주의’ ‘네그리튀드’ ‘아시아 판화운동’ ‘저개발의 기억’ ‘제3세계 여성해방’ ‘삶의 노래’ ‘신국제경제질서’ 등과 같은 각각의 표제어들은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이 전개된 역사적 시대의 ‘총체성’을 구축하는 하나의 단편이자 알레고리로서 기능한다.
엮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통상적인 사전식 서술에서 비껴나 다양한 삽화와 사건, 인물을 출현시키며 각각의 주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상연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목표는 ‘민족경제론/민족문학론’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민족 알레고리’ 개념, 즉, 탈식민을 겪은 제3세계 국가의 “개인의 인생 역정은 자신의 속한 세상을 나타내는 알레고리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사고와 곧바로 연결된다. 나는 어떤 이야기들은 희망에 들떠 읽었고, 어떤 이야기들에는 분노했고, 또 어떤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단어들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거나 무시해왔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서 비동맹운동은 역사책에 나오는 작은 삽화로 축소되어 있었고, ‘민족주의’ 비슷한 단어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곤 했었다. 제3세계와 비동맹운동이라는 프로젝트의 흥망성쇠를, 그것을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인물, 사건, 열정, 이상, 정치, 투쟁, 실천, 배반, 좌절을 증언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지금은 한껏 사소해지고, 세계 질서에 의해 그 의미가 일방적으로 윤색되고 확정되어버린 저 단어들이 다른 가능성과 폭발력을 품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했다.
엮은이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재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침울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유토피아적인 섬광을 확인하는 일”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고통과 부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바로 20세기의 후반부에 등장했다 소멸했던 그 “유토피아적인 프로젝트의 실패와 배반이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