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거대 진입장벽 걷어내야 나라가 산다
자유민주주의가 시장경제와 궁합이 잘 맞는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자유, 특히 경제적 자유 없이는 5000만 인구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재능과 아이디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어렵고 공정경쟁과 혁신을 주도할 기회도 생기지 않는다. 1980년대 말 옛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린 체제경쟁의 승자는 시장경제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였다.

진입장벽은 자유와 공정경쟁의 기회를 억제한다는 점에서 폐해가 막심하다. 그 폐해가 얼마나 큰지는 우리나라 교육과 노조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의 실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법적 제도적 규제만이 진입장벽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때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오히려 더 높고 견고하다. 국제무역에서 눈에 보이는 관세장벽보다 숨어있는 비관세장벽이 허물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군대의 침략은 저항할 수 있어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막을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 명언이 허언으로 전락한 곳이 우리나라 공교육이다. 이념적으로 경도된 교육감과 전교조의 획일주의 및 전횡에 다수가 침묵하는 동안 시대가 요구하는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기계적 평등이라는 진입장벽 앞에서 길을 잃었다. 다른 곳도 아닌 교육의 장에서 개인의 창의력과 재능을 배양할 자유와 기회가 박탈당한 것이다. 진입장벽의 폐해는 공교육의 붕괴와 천문학적 사교육비 부담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귀족노조가 쌓아 올린 거대한 진입장벽의 그림자다. 불법파업, 대체근로 봉쇄, 극심한 정치투쟁 등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얻어낸 고임금이 바로 귀족노조가 쌓은 진입장벽이다. 생산성을 초과하는 고임금으로 기업의 투자와 정규직 일자리 창출 여력이 위축되면서 저임금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귀족노조는 고임금 장벽도 모자라 불법적 고용세습이라는 이중의 장벽까지 세웠다.

그럼에도 귀족노조의 탐욕은 끝이 없다. 일정 규모 이상 노조를 대상으로 정부가 요구한 ‘최소한의 회계 투명성 증빙자료 제출’도 상당수 노조가 노동탄압이라며 거부하고 있다. 거대 야당은 정부의 재정자료 요구 권한을 명시한 노동조합법 조항을 삭제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포퓰리즘 정당과 타락한 귀족노조가 결탁해 견제받지 않는 특권의 장벽을 쌓으려 하고 있다.

요즘 거대 야당의 돈봉투 사건과 청년 정치인의 ‘남몰래 암호화폐 투자’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내로남불과 방탄국회라는 말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고 하루가 멀다고 정치인의 비리가 헤드라인 뉴스를 장식한다. 염치도 논리도 없는 낯 뜨거운 아전인수와 물타기는 기본이다. 토론과 협상이 사라진 공간은 고성과 욕설이 채운다. 국민의 탄식과 질타가 넘쳐나지만 정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괴감은 국민의 몫이다.

왜 그럴까. 정치권이 특권 유지를 위해 스스로 진입장벽을 새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막장 정치의 민낯을 서슴없이 드러내 유능함과 봉사 정신을 겸비한 인물들이 정치권에 진입할 엄두조차 못 내도록 장벽을 세운 것이다. 정치를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로 이 장벽을 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특권을 좇는 불나방일 가능성이 높다. 다수결이 지배하는 정치권의 진입장벽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이유다.

진입장벽이 드리운 길고 어두운 그림자는 자유와 투명성을 몰아낸다. 자유와 투명성 없이는 공정경쟁과 혁신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득권 세력이 세운 거대 진입장벽을 스스로 허물지 않는다면 외력으로 장벽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당성을 갖춘 외력을 만드는 것은 정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작금의 정치가 그런 외력을 만들어낼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밤거리가 환한 것은 낡은 가로등이 아니라 영업이 끝난 수많은 가게의 꺼지지 않은 실내 조명 때문이다. 작은 불빛이 모여 어둠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진입장벽의 최대 피해자가 직접 나서 국민을 설득하고 정치를 바꾸는 것 외에 대안이 없어 보인다. 더 늦기 전에 자유와 공정에 목마른 젊은 세대가 나서야 한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