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넣으니 새 종이 나오네"…프린터 명가 日 엡손의 도전
일본 도쿄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3시간 달리면 닿는 나가노현. 부드럽고 풍미 좋은 메밀 덕분에 ‘메밀국수(소바)의 고장’으로 통하는 지역이다. 메밀소바와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이 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인 세이코엡손(엡손)이다. 나가노에선 지역 경제를 견인하는 ‘대들보’로 여겨진다. ‘모노즈쿠리(物作り·장인정신)’를 바탕으로 성장한 엡손은 최근 폐지를 새 종이로 바꾸는 사무용기기 ‘페이퍼랩’(사진)을 앞세워 세계 시장 개척에 나섰다.

지난 24일 나가노현 시오리지의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를 찾았다. 해발 3000m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축구장 30개 크기인 22만㎡ 규모의 연구개발(R&D)센터와 프린터 공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6800명의 임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942년 ‘세이코’라는 이름의 브랜드 시계를 주문 제작하면서 사세를 키운 엡손은 시계 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프린터, 프로젝터, 산업용 로봇 등의 사업영역을 개척했다.

엡손은 이들 제품의 맥을 잇는 주력 상품을 발굴 중이다. 이날 히로오카 사무소를 방문한 기자들에게 공개한 페이퍼랩(A-8000Z)이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제품은 2016년 11월 세계 최초로 출시된 이후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페이퍼랩에 사용한 종이를 넣으면 1시간 동안 새 A4용지 약 720장을 생산한다. 가로 2.85m, 높이 2.01m, 무게 1750㎏의 페이퍼랩은 폐지를 잘게 뜯어 결합하는 과정을 반복해 깨끗한 종이를 만들어냈다. 복사 용지는 물론 명함과 팸플릿 용지도 생산이 가능하다. 만들어 내는 종이 색상·두께도 조절할 수 있다.

엡손 관계자는 “종이를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목재·물 사용량을 대폭 줄일 수 있는 친환경 제품”이라며 “문서 파쇄기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약 7.9t의 종이를 만들려면 통상 나무 생육 단계부터 7759㎥ 정도의 물이 소모된다. 하지만 페이퍼랩으로 동일한 양의 종이를 생산할 때 사용되는 물은 약 71㎥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개당 2500만엔(약 2억5000만원)가량인 이 제품은 일본의 롯데, 미즈호, SMBC, 산요 등 72개 기업과 공공기관 등이 사용 중이다.

엡손은 지난해(2022회계연도) 각각 1조3303억엔(약 13조1700억원), 951억엔(약 9410억원)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프린터 사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67.8%에 달한다. ‘페이퍼리스’(종이 문서를 사용하지 않는 것) 문화가 퍼지고 있지만 회사 기업가치는 되레 높아지고 있다. 최근 석 달 새 주가만 15%가량 뜀박질했다. 페이퍼랩을 비롯한 신사업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면서다.

오가와 야스노리 세이코엡손 사장은 “내년 한국에서 페이퍼랩 신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라며 “기존 제품보다 몸집을 줄이고 가격도 경쟁력 있는 수준으로 내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대기업들과 손잡고 신사업도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가노(일본)=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