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내밀한 지점으로 파고들어가는 치트 키
MBTI로 치자면 T(Thinking 사고 유형)의 답일 테다. 발신자가 공감이나 동조를 기대하며 던진 질문이라면, 수신자는 사실 판단에 근거한 결정론자 같은 답을 건넸으니 답을 하는 이는 대략 T쪽에 가까운 성격유형일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에 알려진 T적인 특질만으로는 살짝 의미가 완성되어 보이진 않는다. 질문에 대한 답이 판단의 옳고 그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말일 텐데, 사실의 객관적인 판단만을 선호하는 T의 해석만으로는 부족한 그 무엇, 아마도 문학이나 철학에서 끌고 와 보완되어야 할 그 무엇이 저 위의 문답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질문은 현재에서 과거에 대한 물음처럼 보인다. 그 시간 속에 존재했던 ‘우리’의 상태를 멀리 떨어져서 관측해보자,라는 청유의 형태로도 읽힌다. 또는 완료된 현재의 상태를 상호 공유하고 공감하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반대로 답은 질문의 의도에 반한다. 상태를 물었지만 완료로 답하고 공유의 심정을 토로했으나 공유할 수 없거나 아예 공유되지 못한 결과를 단정한다. 생각의 길이와 넓이를 차단하는 것. 의미의 부피를 팽창시키려는 시도를 단번에 차단해버리는 효과 같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맥락에 상관없이 결과를 수용하게 만들어버리는 칼 같은 대답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드디어 그렇게 된 것뿐이라는 식. 그렇다면 왜 이런 질문이 튀어나오고 왜 저러한 답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 문학은, 소설은 아마도 이런 문답의 간극을 채워주는 중요하고도 기술적인 장르라 할 수 있겠다. 문답 안에 숨어 있는 뉘앙스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몸을 빌려 확장되고 구성되니 말이다. 권여선의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은 아마도 그런 의미적 탈락을 문학적으로 보완해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내밀한 지점으로 파고들어가는 치트 키
30년 전 스무 살, 충동적으로 강촌에 놀러갔던 ‘우리’가 있다.(<사슴벌레식 문답>은 네 사람이 주인공인데 대학 때 같은 하숙방에 머물던 그들이다). 같이 떠나는 것만으로, 뭉쳐 있는 것만으로도 들뜨던 시절. 누구나 그러하듯 스무 살이란 그런 것이다. 충동이지만 일상으로 마무리되고, 미숙했으나 완숙으로 점철되는. 소설 속 그들도 그런 시간 안에 놓여 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마당을 배회하는 동안 비질을 하고 있는 한 친구에게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숙소에 사슴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있다. 그 누구도 손쓸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나가던 숙소주인이 그 상황을 통제한다. 방충망도 있는데 이 큰 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냐고 묻는 한 친구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득도한 표정으로 숙소주인은 말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어떻게든 어디로든 들어오고야 마는 사슴벌레에서 원인보다 한 발 앞서 있는 결과를, 결론을 발견한 것이다. 상태보다 결과를 말하는 구도자의 문답에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슴벌레식 문답’을 착안해낸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며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며 윽박지르는 강요 같은 답을 말이다. 원인을 특정할 수 없고 그래서 결론만을 대답할 수밖에 없는 막막한 표현이랄 수 있는 사슴벌레식 문답. 그 30년 전에는 재미삼아 농담처럼 했던 그 문답이 시간을 제대로 ‘맞은’ 우리들의 현재에서는 어떻게 읽힐까?―어떻게든 읽혀.

네 사람은 30년이란 시간을 맞았다.(‘맞았다’가 타동사로 읽히기를…) 충동적으로 떠날 수 없고, 애틋했던 과거의 추억은 다양하게 변질되어 감추려 드는 친구와, 애써 벗어나고픈 시간이 되어 현재에 갇히고 마는 ‘나’가 있다.(친구 중 한 명의 자살 때문이기도 하고 간첩사건에 연루된 친구의 배우자를 배신하는 사건 때문이기도 하다) 문득, 나는 30년 전의 강촌 여행이 떠오른다. 같이 떠났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강촌 여행은 자연스레 사슴벌레 에피소드가 떠오르고 연이어 사슴벌레식 문답이 네 사람의 현재 상황에 문답으로 같이 따라온다.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 나 어떻게든 너한테 이래/니가 어떻게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떻든 이 지경이 되었어.

체념의 답이랄까. 패배한 자의 절망의 표현이랄까. 스무 살에는 오고갔던 농담이 오십에 와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으른’의 문답으로 돌아와 삶의 패배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대변해준다. 어른이 아니라 ‘으른’의 말들로. 어쩌면, 어른소설이 아니라 ‘으른소설’이 권여선에게는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건 농밀한 삶의 터럭들이, 내밀하게, 찐으로, 뭐 이런 낱말들이 권여선의 소설에서는 실제적으로 풀이되고 확장되게 씌어져 문학적 의미망으로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별 거 아닌 벌레의 모습에서,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사슴벌레에서 기인해, 어릴 때에는 알지 못하거나 알아서도 아니 될 그런 정언명령 같은 문답이 현재의 내밀한 상황을 파고드는 것처럼. 이미 그렇게 될 것이 드디어 그렇게 된 것뿐이라는 무서운 뉘앙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