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원의 헬스노트] 7천명 암수술 의사가 새 '한글 글꼴' 개발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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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갑 국립암센터 초대 원장, 대한의원개원칙서 글씨체로 '한글재민체' 완성
글꼴 5만벌 대학·공공기관 배포 예정…"희망 잃지 않으면 뜻 이룰 수 있어" "평생 암 환자를 수술하며 살았지만, 하늘에 뜻이 닿아야 원하는 일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늘의 도움으로 새로운 한글 글꼴을 만들어낸 것처럼 암 환자들도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암 환자 7천명을 수술한 박재갑(75) 전 서울대병원 외과 교수. 그가 최근 '한글재민체'(韓契在民體)라는 새로운 한글 글꼴을 완성하고, 이 글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 '한글재민체소고'(韓契在民體小考)를 펴냈다.
박 교수는 국립암센터 초대 원장을 지낸 '천상' 의사다.
근엄하다 못해 때론 무섭기까지 한 외과 의사로, 대장암 등의 수술에 진력하며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또 몸에 해로운 담배를 없애기 위해 헌법소원을 내는 등 암 예방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2013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을 맞았다.
박 교수처럼 이름난 대학병원의 교수들은 보통 정년을 맞이하면 다른 병원으로 옮겨 환자들을 계속 진료하거나 그동안 누리지 못한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박 교수는 한글에 '미쳐' 살았다.
의사가 왜 그랬을까.
'혹시 세종대왕의 후손이라도 되나요'라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근엄한 눈빛은 기자를 무색하게 했다.
이야기는 박 교수가 2013년 정년퇴직 후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예를 배우면서 서울대병원 재직 당시 무심코 지나쳤던 '대한의원개원칙서'(大韓醫院開院勅書)에 다시 눈을 뜨게 됐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본관에 걸려 있는 이 칙서는 1908년 10월 24일 대한의원 개원일에 황제 순종이 내린 것이다.
선왕인 고종 대부터 추진한 일을 매듭지은 것임을 밝히고 백성들에게 의료의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황제의 뜻이 담겼다.
식민지 보건의료의 중추 기능을 담당했던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 기관임을 선포한 것이다.
박 교수는 "대한의원개원칙서를 다시 자세히 본 순간 그동안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한글 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단아하고 꼿꼿하며 아름다워 보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이 아름다운 한글 서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부터 박 교수의 삶은 달라졌다.
한글학자 박갑수 교수에게 부탁해 기존의 국역 문장을 다듬은 후 칙서의 글꼴과 유사하게 붓으로 쓰는 연습을 반복했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김민 원장은 2019년 새해 인사차 박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8년 남은 정년까지 칙서에 기반한 서체를 함께 개발하고 싶다며 의기투합했다.
그로부터 1년 만에 '한글재민체1.0'이 개발됐고, 이후 매년 한글날에 맞춰 개량판이 발표됐다.
이달 25일에는 윤디자인그룹과 협업으로 한글, 로만, 아라비아숫자, 번체, 간체, 가나 문자, 일본 표준 한자를 동일한 필체로 개발한 한글재민체 5만벌이 대학, 공공기관, 도서관 등에 무료로 배포될 예정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새로운 글꼴인 것은 알겠는데, 왜 재민체이고, 그동안의 한글과는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사실 지금까지 한글을 쓰고 읽는데 불편함이 없지 않았던가.
박 교수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재민체는 '주권재민'(主權在民)에서 따 왔다.
글꼴은 칙서에 등장하는 33자 한글 자소(字素)에 기반했다.
이를 2천350자의 글꼴로 디지털화한 것이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이규선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칙서의 글씨체에 대해 "세로획들은 상단에서 빠르게 하단으로 시점이 이동하면서 곧게 떨어지다가 날렵하게 맺어지고, 가로획들은 붓보다는 칼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기울기와 날카로움을 보여준다.
필획의 섬세한 단아함이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서체 개발은 김민 교수와 그가 지도하는 4명의 박사 과정생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글꼴 개발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리 알았다면 시작을 안 했을 것"이라고 개발 과정을 소회했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글꼴 개발의 실마리가 된 칙서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아직 해소하지 못한 부분이다.
후세가 이 글씨체에 반해 새로운 글꼴을 개발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이 글씨의 원조는 찾지 못한 셈이다.
박 교수는 "글씨를 누가 썼는지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조선시대에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였던 사자관 등이 쓴 것으로만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박 교수는 대한의원개원칙서가 문관(文官), 서사관(書寫官), 사자관(寫字官) 등이 공식 문서 등에 바르게 또박또박 쓴 정자체라는 의미에서 '관공체'(官公體)라는 별칭을 부여했다.
그는 새 한글 끌꼴 개발 과정을 암 환자 치료를 위한 다학제 진료에 비유했다.
박 교수는 "글꼴을 개발하는 과정에 여러 전문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글재민체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병원에서 여러 진료과 교수가 함께 의견을 나누고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가는 다학제 진료가 꼭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글재민체는 누구에게나 무료다.
한글재민체나 전자책을 받고 싶은 기관이나 개인은 한글재민체연구회(https://www.hangeuljaemin.kr/)로 연락하면 파일을 받을 수 있다
/연합뉴스
글꼴 5만벌 대학·공공기관 배포 예정…"희망 잃지 않으면 뜻 이룰 수 있어" "평생 암 환자를 수술하며 살았지만, 하늘에 뜻이 닿아야 원하는 일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늘의 도움으로 새로운 한글 글꼴을 만들어낸 것처럼 암 환자들도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암 환자 7천명을 수술한 박재갑(75) 전 서울대병원 외과 교수. 그가 최근 '한글재민체'(韓契在民體)라는 새로운 한글 글꼴을 완성하고, 이 글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 '한글재민체소고'(韓契在民體小考)를 펴냈다.
박 교수는 국립암센터 초대 원장을 지낸 '천상' 의사다.
근엄하다 못해 때론 무섭기까지 한 외과 의사로, 대장암 등의 수술에 진력하며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또 몸에 해로운 담배를 없애기 위해 헌법소원을 내는 등 암 예방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2013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을 맞았다.
박 교수처럼 이름난 대학병원의 교수들은 보통 정년을 맞이하면 다른 병원으로 옮겨 환자들을 계속 진료하거나 그동안 누리지 못한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박 교수는 한글에 '미쳐' 살았다.
의사가 왜 그랬을까.
'혹시 세종대왕의 후손이라도 되나요'라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지만, 그의 근엄한 눈빛은 기자를 무색하게 했다.
이야기는 박 교수가 2013년 정년퇴직 후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예를 배우면서 서울대병원 재직 당시 무심코 지나쳤던 '대한의원개원칙서'(大韓醫院開院勅書)에 다시 눈을 뜨게 됐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본관에 걸려 있는 이 칙서는 1908년 10월 24일 대한의원 개원일에 황제 순종이 내린 것이다.
선왕인 고종 대부터 추진한 일을 매듭지은 것임을 밝히고 백성들에게 의료의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황제의 뜻이 담겼다.
식민지 보건의료의 중추 기능을 담당했던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 기관임을 선포한 것이다.
박 교수는 "대한의원개원칙서를 다시 자세히 본 순간 그동안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한글 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단아하고 꼿꼿하며 아름다워 보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이 아름다운 한글 서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부터 박 교수의 삶은 달라졌다.
한글학자 박갑수 교수에게 부탁해 기존의 국역 문장을 다듬은 후 칙서의 글꼴과 유사하게 붓으로 쓰는 연습을 반복했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김민 원장은 2019년 새해 인사차 박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8년 남은 정년까지 칙서에 기반한 서체를 함께 개발하고 싶다며 의기투합했다.
그로부터 1년 만에 '한글재민체1.0'이 개발됐고, 이후 매년 한글날에 맞춰 개량판이 발표됐다.
이달 25일에는 윤디자인그룹과 협업으로 한글, 로만, 아라비아숫자, 번체, 간체, 가나 문자, 일본 표준 한자를 동일한 필체로 개발한 한글재민체 5만벌이 대학, 공공기관, 도서관 등에 무료로 배포될 예정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새로운 글꼴인 것은 알겠는데, 왜 재민체이고, 그동안의 한글과는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사실 지금까지 한글을 쓰고 읽는데 불편함이 없지 않았던가.
박 교수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재민체는 '주권재민'(主權在民)에서 따 왔다.
글꼴은 칙서에 등장하는 33자 한글 자소(字素)에 기반했다.
이를 2천350자의 글꼴로 디지털화한 것이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이규선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칙서의 글씨체에 대해 "세로획들은 상단에서 빠르게 하단으로 시점이 이동하면서 곧게 떨어지다가 날렵하게 맺어지고, 가로획들은 붓보다는 칼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기울기와 날카로움을 보여준다.
필획의 섬세한 단아함이 느껴진다"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서체 개발은 김민 교수와 그가 지도하는 4명의 박사 과정생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글꼴 개발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리 알았다면 시작을 안 했을 것"이라고 개발 과정을 소회했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글꼴 개발의 실마리가 된 칙서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아직 해소하지 못한 부분이다.
후세가 이 글씨체에 반해 새로운 글꼴을 개발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이 글씨의 원조는 찾지 못한 셈이다.
박 교수는 "글씨를 누가 썼는지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조선시대에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였던 사자관 등이 쓴 것으로만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박 교수는 대한의원개원칙서가 문관(文官), 서사관(書寫官), 사자관(寫字官) 등이 공식 문서 등에 바르게 또박또박 쓴 정자체라는 의미에서 '관공체'(官公體)라는 별칭을 부여했다.
그는 새 한글 끌꼴 개발 과정을 암 환자 치료를 위한 다학제 진료에 비유했다.
박 교수는 "글꼴을 개발하는 과정에 여러 전문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한글재민체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병원에서 여러 진료과 교수가 함께 의견을 나누고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가는 다학제 진료가 꼭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글재민체는 누구에게나 무료다.
한글재민체나 전자책을 받고 싶은 기관이나 개인은 한글재민체연구회(https://www.hangeuljaemin.kr/)로 연락하면 파일을 받을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