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끗한 머리, 깊게 패인 주름, 검정색 연미복…

사람들의 머릿 속에 들어있는 '거장' 지휘자의 모습은 대개 이렇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끌려면 그만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그 카리스마는 경륜에서 나온다는 생각에서다.

'자신과의 싸움'인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의 경우 '몸'(손놀림)과 '마음'(집중력)이 절정의 상태인 20대 때 전성기를 맞는 연주자가 많다. 하지만 지휘는 단원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게 중요한 덕목이란 점에서 '젊은 거장'이 나오기 힘든 분야란 인식이 팽배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도 이제 옛말이 되고 있다.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탁월한 실력으로 인정받는 젊은 지휘자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어서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 사진=롯데문화재단
핀란드 출신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 사진=롯데문화재단
핀란드 출신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 사진=롯데문화재단

'젊은 지휘 거장'의 스타트는 해외에서 먼저 끊었다. 주인공은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임된 클라우스 메켈레(27). RCO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세계 최정상 악단이다.

핀란드 태생인 메켈레는 20대 초반부터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최연소 수석 객원지휘자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 △파리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지명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지난해부터 RCO의 아티스틱 파트너로 활동 중인 그는 31세가 되는 2027년, RCO 수석 지휘자로 임명된다.

'제2의 메켈레'가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선 윤한결 이승원 최재혁 이규서 등을 후보로 꼽는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이들 1990년대생 지휘자들의 이력과 음악 스타일 등을 아르떼가 살펴봤다.

○'악기의 리더' 꿈꾸는 젊은 지휘자들

90년대생 한국 지휘자 4인. 위쪽은 이규서(왼)와 이승원. 아래쪽은 윤한결과 최재혁. 사진=각 지휘자 홈페이지
90년대생 한국 지휘자 4인. 위쪽은 이규서(왼)와 이승원. 아래쪽은 윤한결과 최재혁. 사진=각 지휘자 홈페이지
90년대생 한국 지휘자 4인. 위쪽은 이규서(왼)와 이승원. 아래쪽은 윤한결과 최재혁. 사진=각 아티스트 공식 홈페이지

지휘자가 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다. 일반적인 방법은 이렇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대개 지역별로 오페라 극장을 운영하는데, 지휘자들은 통상 이런 곳에 취직한다. 지역 교향악단에 오페라 코치(반주자)-제2 카펠마이스터-제1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 등의 단계를 거쳐 지휘자로 성장하게 된다.

두번째 방법은 '속성 코스'다. 거장 지휘자의 눈에 들거나 콩쿠르 우승으로 유명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 기회를 얻는 방법이다. 특정 악단에 영입되거나 초청이 지속되면 지휘자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

1. 속성코스의 '엘리트' 윤한결

윤한결(29)은 '속성 코스'를 밟은 대표적인 젊은 지휘자다. 그는 20대 초반이었던 2017년부터 뉘른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노이브란덴부르크 필하모닉 등에서 부지휘자로 일했다. 작곡을 전공한 그는 페터 외트뵈시 재단의 위촉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콩쿠르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실력도 입증했다. 그는 지난 4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결선에 진출했다. 이 콩쿠르는 역사적인 지휘자 카라얀의 정신을 이을 지휘자들을 뽑는 콩쿠르로 오스트리아 출신 지휘자 만프레드 호네크가 심사위원장을 맡고있다.

윤한결은 올해 320명의 지원자 중 결선진출자 3명에 선발돼 오는 8월 세계 최대 음악 축제'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봉을 잡는다. 2019년에는 한국인 최초 네메 예르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네메 예르비상은 또다른 유럽의 대규모 음악축제인 그슈타트 메뉴인 페스티벌에서 수여하는 상이다.

윤한결은 작년 말 사이먼 래틀, 다니엘 바렌보임, 정명훈 등이 소속된 세계적인 클래식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사인 아스코나스 홀트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이름값을 끌어올렸다.

그는 양손을 잘 활용하는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손 동작을 최대한 활용해 음악을 이끄는 편이다. 2021년 말 국립심포니 지휘 콩쿠르 결선에서 "내 두 손으로 모든 음악을 만들어가는데 지휘자로서 쾌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계 관계자는 "윤한결은 지휘자인 동시에 작곡가란 점에서 현대음악을 특히 더 노련하고 섬세하게 다룬다"고 했다.

2. 민첩하고 깔끔한 이규서

이규서(30)는 또래와 함께 악단을 만든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한 이규서는 2014년 서울대 졸업생들과 의기투합해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OES)을 창단했다. OES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체임버 오케스트라지만 예술의전당을 중심으로 10년째 활발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성 악단과 달리 단원과 지휘자 간의 수평적인 소통, 대형 오케스트라에서 느끼기 어려운 친근함이 특징이다. 신세대 악단의 대표주자인 OES는 클래식 공연계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OES 창단 연주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맡았고 이후에도 손열음, 이진상, 문지영 등 내로라하는 젊은 피아니스트들과 협연 무대를 꾸몄다.

이규서는 날씬한 몸매 덕분에 지휘할 때 민첩하게 움직인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이규서의 지휘를 보면 스승인 임헌정이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 관현악단 단원은 "이규서는 굉장히 심플하고 깔끔하게 지휘하는 편"이라며 "열정이 가득하고 작품에 대해서도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곡에 대한 면밀한 해석과 분석을 토대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이다.

3. '비올라 천재' 이승원…실내악 하듯 면밀한 소통

비올리스트 겸 지휘자 이승원(32)은 미국 명문 악단인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를 맡고 있다. 그는 2018년 루마니아 BMI 국제 지휘 콩쿠르와 2019년 대만 타이베이 지휘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했으며 같은 해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열린 키자나 페스티벌 지휘 오디션에서 발탁돼 거장 다니엘레 가티에게 2주간 지휘를 배웠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무티 이탈리아 오페라 아카데미' 오디션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선발돼 세계적인 거장 리카르도 무티에게 오페라 지휘 노하우를 배울 기회를 얻기도 했다. 리카르도 무티는 '최고의 베르디 해석가'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오페라 지휘에서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실내악단 '노부스콰르텟'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지휘자로서의 모습도 실내악을 할 때처럼 잘 듣고 잘 소통한다는 평이다. 비올라를 연주하면서 얻은 음악적 자신감 덕분에 지휘할 때도 힘이 넘친다. (이승원은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승원과 함께 연주한 한 단원은 "비올리스트 출신이다보니, 현악 파트를 이끌 때 현악기 주자들만이 이해하는 언어를 직관적으로 잘 전달한다"며 "이를테면 비브라토(소리를 떠는 것)를 요청할 때 어떻게 연주해달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4. 작곡·지휘 넘나들며…음악 외연 넓히는 최재혁

최재혁(29)은 동갑내기 윤한결처럼 해외에서 작곡과 지휘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다. 2017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거머쥐며 주목받은 그는 이듬해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사이먼 래틀, 던칸 와드와 한 무대에 서며 지휘자로 데뷔했다. 당시 독일 현대음악 작곡가 슈톡하우젠의 3개의 오케스트라와 3명의 지휘자를 위한 '그루펜'을 연주했다.

최재혁은 이후 파보 예르비가 한국에 왔을 때 부지휘자로 일했고, 빈 오페라 아카데미 부지휘자,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객원 부지휘자 등을 맡았다. 2015년부터는 앙상블블랭크 예술감독에 올랐다. 앙상블블랭크는 국내외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예술단체. 클래식뿐 아니라 현대음악,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현재 진행형' 클래식을 꿈 꾼다.

앙상블블랭크 단원인 첼리스트 이호찬씨(32)는 최재혁을 두고 "매우 유연한 지휘자"라고 했다. 그는 "최재혁은 자유롭고 혁신적이지만 그 안에 형식과 중심을 잃지 않고 악단을 이끌어 나간다"고 말했다.

○"지휘자는 모든 악기를 경영하는 CEO"

실력 있는 젊은 지휘자들의 잇따른 등장에 국내 클래식 음악계는 한껏 고무돼 있다. 이들 덕분에 향후 한국 클래식 음악이 몇단계 발전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지휘는 다른 어떤 클래식 분야보다 문턱이 높아서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려면 실력은 기본이고, 인맥, 운 등 온갖 것들이 있어야 한다. 20~30대 지휘자가 이런 걸 갖추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런 높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아지다보면 힘이 빠져 기량이 옛날보다 떨어지기도 한다.

한 관현악단 사무국장은 "지휘자가 되는 것은 현악, 관악 등 모든 악기를 경영하는 CEO가 되는 것"이라며 "경험이 부족한 젊은 지휘자들이 단원들의 '정서 관리'와 같은 음악 외적인 것까지 챙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포디움의 기회는 갈수록 좁아지는 추세다. 오페라 극장이나 악단 수에 비해 지휘자를 꿈꾸는 이들은 많아서다. 클래식 공연 시장이 크지 않은 국내 환경은 더더욱 기회가 적다. 젊은 지휘자 대부분 일찍이 유학길에 오르는 이유다.

불혹에 접어든 지휘자 지중배(41)는 1990년대생들의 바로 윗세대 선배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국내에서는 '유럽파 젊은 지휘자'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후배들에게 "지휘의 본질은 '설득의 과정'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란 얘기를 자주 한다.

"지휘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단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해석을 강하게 밀어부칠 지휘자도 있고, 천천히 설득하면서 이해시키는 스타일도 있을겁니다. 젊은 지휘자라면 두번째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단원들이 감화되면 나이가 어리든, 많든 지휘자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