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시인' 파파이오아누, 이번엔 조명 끄고 물을 쏟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무대에서 가느다란 물줄기 소리들이 들려온다. 마치 보슬비가 내리는 것 같다. 물 튀기는 소리가 무대를 채우자 작은 조명이 남자 하나를 비춘다. 옷이 흠뻑 적은 남자다.

그는 침착하고 성숙한 동작으로 무대를 누비다가 또 다른 남자를 발견한다. 벌거벗은 젊은 남자는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두 남자는 무대 위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면서도 밀어낸다. 마치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연대하고 공존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 ‘무대 위의 시인’ 6년만의 내한

연극과 무용, 퍼포먼스 등을 하나의 공연으로 구성한 ‘잉크’는 드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59)가 6년 만의 내한에서 선보이는 신작이다. ‘무대 위의 시인’ 파파이오아누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의 총연출을 맡았으며 안무가와 배우, 무대·조명·의상 디자이너를 겸하는 전방위 예술가다. 그는 파격적이면서도 실험적인 공연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아왔다. 갖가지 상징과 은유가 녹아든 시적이면서도 그림 같은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캐나다·헝가리 등을 거쳐 아시아에서 처음 공연되는 ‘잉크’는 물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파파이오아누는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물이 가진 (물리적) 특성을 활용하면 여러 은유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며 “옷감이 물에 젖었을 때 비닐처럼 빛을 반사하는 특징이나, 물을 한참동안 틀어놨을 때 둥근 비닐에 고여 있는 물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은하계 모습을 연상케하는 등 물이 가진 흥미로운 특성을 사용해 무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무대 위의 시인' 파파이오아누, 이번엔 조명 끄고 물을 쏟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시가 탄생한다”고 했다. 일상의 소박한 소재를 활용해 예술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에서 쓰인 소품도 정원용 호스나 플라스틱 판넬, 테이블과 의자, 유리 항아리 등이 전부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에 배우들의 신체 변형과 움직임 등이 어우러지면 한편의 회화와도 같은 무대가 완성된다.

작품에는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를 그린 명화나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춘화 속 문어 형상 등을 오마주한 장면들이 포함됐다. 여러 은유들이 사용되지만 파파이오아누 직접적 해석을 거절했다. 그는 “자세하게 작품의 서사나 메시지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 않다”며 “내 설명이 관객에게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해 감상에 방해가 될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구상한 것을 명료하게 실행하는 사람일 뿐이고, 그것에 대해 분석하는 건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무대 위의 시인' 파파이오아누, 이번엔 조명 끄고 물을 쏟았다

○종이 대신 무대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파파이오아누는 원래 화가였다. 아테네 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뒤 미술계에서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춤을 배우면서 창작 영역을 공연예술로 옮겨 왔다. 그의 공연들에서 시각적 요소가 강조되는 특징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파이오아누는 “스스로 항상 ‘화가의 눈’으로 공연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캔버스나 종이 대신 무대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본인 예술의 장르를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파파이오아누는 “이번 작품은 무용과 연극, 퍼포먼스의 융합”이라며 “연극과 무용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찾아 맞는 ‘파파이오아누만의 장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대의 동료들과 협업하고 관객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공연예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파파이오아누는 은유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로 ‘무대 위의 시인’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본인의 별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인(poet)’의 어원은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저 움직임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에요. 제 예술을 완성시켜주는 건 바로 당신, 관객들입니다.”

신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