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한경아르떼TV 개국과 함께 시작한 프로그램 ‘옴브라 마이 푸’ 가 어느덧 그 1시즌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봄이었다.

클래식 음악가들을 게스트로 그들의 음악과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진행을 맡았고 이제 우리는 첫 시즌의 마지막 두 편을 촬영하기 위해 통영국제음악제를 찾았다.

무대에 오르고 노래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게 잠깐 낯설게 느껴졌지만 바다 가까이에서 푸른 숨을 쉬고 있는 음악당의 전경에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통영, 아름다운 고향의 봄
빨강, 파랑 태극의 띠를 두른 커다란 팔분음표가 당당히 방문객을 맞는데, 정진아 작가의 ‘통영의 소리 - Musique’ 라는 작품이다.

벌써 10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경쾌함은 음악제에 대한 기대를 한껏 더 부풀게 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나의 스승 박노경 교수님의 첫 통영 방문 때의 이야기다.

통영국제음악제 창립자 중 한 명이자 당시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던 아들, 김승근 (서울대 국악작곡과) 교수가 윤이상 선생의 고향에 음악제를 열었다 하여 지인들을 모시고 가셨는데, 점잖게 차려입고 손님을 맞고 있을 줄로 기대한 아들이 야광 조끼를 입고 입구에서 주차 안내를 하고 있더란다!

어찌나 속이 상하고 실망스럽던지 그길로 되돌아오고 싶으셨다고. 하지만 그 크던 실망은 해가 거듭될 수록 음악제가 성장하고, 이윽고 음악당이 세워지고, 그 후로 또 십 년이 지난 오늘날 큰 자랑과 자부심의 일화가 되었다.

남다른 애정과 의지로 큰 꿈을 품었던 분들 덕에 이제 ‘통영’이라는 그 발음 하기도 어려운 도시를 외국의 뛰어난 음악가들이 안다.

현대음악의 불모지나 다름 없던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대해 음악제를 연다는 꿈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일이 20 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후배 음악가들에게 너무도 자랑스런 이름인 진은숙 작곡가가 지난 해부터 예술감독으로 함께 하게 된 통영국제음악제는 그 위상에 있어 더욱 기대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짬이 많이 나지 않는다고 양해를 구했던 진은숙 감독은 인터뷰가 시작되자 음악제에 대한 사랑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쏟아냈다.

이러이러한 음악가들 조합으로 이러이러한 곡을 듣고싶다는 꿈이 있었다며, 모든 리허설에 참관하는 기쁨을 말하는 진 감독은 이제 그 실현을 눈 앞에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소녀 같이 설레어했다.

작곡가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솔직함으로 일관하다 참가하는 동료, 후배 음악가들 이야기에는 무한 신뢰와 애정을 드러내는 그가 참 멋지고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에 에너지가 넘쳐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들었는지 아마 ‘옴브라 마이 푸’ 방송 중 진행자 말수가 가장 적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올려진 무대의 마지막 곡이 끝나자 진 감독은 가장 먼저 일어나 환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자신에게 작곡은 한 곡을 완성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던 말이 대조적으로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작곡가’라는 직업과 ‘예술감독’직의 임무가 서로 좋은 시너지를 내고 있겠다는 생각에 양쪽에 대한 기대감이 모두 더 커졌다!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이끄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가 지난달 31일 경남 통영에서 열린 통영국제음악제 공연에서 베리오의 ‘신포니아’를 연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이끄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가 지난달 31일 경남 통영에서 열린 통영국제음악제 공연에서 베리오의 ‘신포니아’를 연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다음 날 ‘옴브라 마이 푸’는 이번 음악제에 참여하는 몇몇 한국 음악가들을 만났다.

전날 “카바코스와 친구들” 공연에서 엄청난 호연을 펼쳤던 아직 십대의 괴물 첼리스트라 불리는 한재민부터, 현대음악을 시작한 계기부터 그 성공과 애증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그 이해를 도운 한국의 대표적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 지휘자 최수열, 이탈리안 바로크 앙상블과 리사이틀 무대를 앞두고, 낯설고도 신기한 카운터테너의 세계를 보여준 개성 넘치는 카운터테너 김강민 그리고 위그모홀 홀 콩쿠르 우승 이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큰 주목을 받고있는 에스메 콰르텟의 최근 멤버 교체 소식과 새로운 도약을 다지는 모습까지!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는지 이를 한 편에 담아야함이 벌써부터 아쉬울 정도였다. 이렇게 재주 넘치는 음악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음악축제의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매년 봄 대한민국 클래식 애호가들은 ‘통영국제음악제에 다녀온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듯 하다. 세계에 이름난 거장들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한국 출신 음악가들이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무대를 펼치는 곳.

하지만 현대음악이 주류인 이 페스티벌에 그 많은 관객들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것은 음악가의 눈에도 과히 놀라운 현상이다. 주말을 이용해 또는 음악제 기간 내내 통영에 머물며 낮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먹거리를 즐기고 저녁에는 음악회에 가는 일이 큰 부러움을 사기에 이르렀다.

15년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음악제의 크고 작은 고비를 넘기며 이제 통영 사람이 다 된 김소현 본부장은, ‘음악제를 일년내내 했으면 좋겠다는 식당 사장님들도 계신다’ 며 음악제가 음악애호가들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왔음을 뿌듯하게 전했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위촉한 작품들을 한국 또는 아시아 초연으로 경험한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에메랄드 빛의 신비스런 바다를 끼고 무한 매력을 뽐내는 통영의 봄을 동시에 선물하게 된 곳. 윤이상 선생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의 봄’은 올해도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