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와 코로나19 확산 때보다 더 겁이 납니다.” 중소 제조업계는 요즘 ‘진짜 위기가 등장한 것 아니냐’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금리 인상, 경기 침체, 에너지 비용 급증 등의 악재로 사면초가에 놓였지만,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서다.

지난 13일 찾은 경기 시화국가산업단지의 한 산업용 밸브 제조업체 창고에는 팔리지 못한 제품과 각종 원부자재, 중간재로 가득했다. 공장 마당엔 최근 임시창고 2개를 더 설치했다. 이 회사 대표는 “작년 하반기부터 거래처 주문이 줄어 제품이 쌓이고 있다”며 “창업 후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이 꺾였다”고 했다.

◆부도 위기에 ‘살얼음판’ 경영

공장 마당까지 쌓인 재고…"외환위기 때보다 겁나"
경기 체감온도가 급속도로 떨어지는 곳은 반도체 수출 부진에 따른 장비 및 후공정업계다. 국내 한 반도체 후공정 업체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감산을 선언하면서 은행에서 바로 대출 회수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며 “한시적으로 법인세를 인하하고 저금리 대출의 물꼬를 터주지 않으면 자금력을 앞세운 중국 업체들에 넘어가는 기업이 쏟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 장비 1차 벤더 관계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신규 라인 증설을 늦추면서 당초 예정됐던 납품 물량이 축소돼 난처한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7일 경제 동향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산업 관련 지표가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슷한 정도로 악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 2월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반도체 경기 악화로 전월(70.8%)보다 낮은 68.4%를 기록했다.

건설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가구 제조업체들도 고사 위기다. 아파트 특판 업계에선 은행 빚에 허덕이는 5~6개 업체가 추가로 도산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김현석 대한가구산업협동조합연합회 전무는 “부동산 시장 침체로 이사 수요가 급감하면서 가구 제조업계도 불경기에 빠졌다”고 전했다. 원전업계 역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후유증이 적잖이 남아 있다. 원전 주기기 생산업체 관계자는 “작년까지 매출이 제로여서 대출로 겨우 버텼는데 금리가 크게 올라 월 400만원 안팎이던 대출이자가 1000만원까지 불었다”고 말했다.

◆쌓이는 재고, 심화하는 자금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폭등한 에너지 가격도 중소 제조업의 숨통을 조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섬유 염색 공정에 쓰이는 산업용 가스 가격은 2021년 3월 ㎥당 500원 선이었으나 지난달 기준 1327원으로 약 세 배로 뛰었다. 강선규 반월패션칼라사업협동조합 전무는 “염색업체들이 최근 공장 문을 닫는 가장 큰 이유가 에너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은행 이자를 갚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등 공기업의 경영 악화도 중소 제조업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 예산 삭감으로 발주 물량을 크게 줄이고 있어서다. 한수원에 수중 펌프를 납품하던 S사 대표는 “1월 들어 매출이 80%나 감소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재고 관련 지표도 중소 제조업의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통계청의 광업제조업동향조사에 따르면 올해 1월과 2월 중소기업 재고율은 각각 111.7, 109.8을 기록했다. 100 이상이면 출하보다 재고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경기 수원의 한 통신장비용 전원공급장치 생산업체 대표는 “납품하기로 한 물량도 거래처에서 인수를 미루면서 창고에 마냥 쌓아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는 “중소 제조업 위기는 대기업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활로 모색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안산=이정선 중기선임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