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위기에 강한 K반도체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0달러 이하, 그래서 한국의 경제적 기적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제성장의 조건은 북한이 남한보다 순조로운 상태에 있다.”

1960년 미국 포린 어페어스지에 난 우리나라의 서글픈 모습이다. 불과 60년 후 한국 경제는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했고, 많은 K산업이 정상급에 올랐다. 이 같은 도약의 밑바탕에는 거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K산업의 도전정신이 있다.

흔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한다. 하지만 치열한 무한경쟁 시대에는 새우가 고래 싸움 덕을 볼 수도 있다. 초강대국들이 다퉈야만 기존의 세계시장 질서가 요동치고 우리가 도전할 틈새가 생기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1980년대 미·일 무역전쟁이다. 1981년 일본 소형차의 대미 수출을 막기 위해 미·일 자동차 자율수출규제(VER)를 했다. 이 덕분에 미국 소형차 시장에 생긴 공백을 ‘포니’가 뚫고 들어간 것이다. K반도체도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반도체가 휘청거릴 때 승기를 잡았다.

요즘은 다시 한국 경제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중 패권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탄소중립, 미·중 반도체 전쟁 등으로 소위 ‘복합위기(polycrisis)’라는 것이다. 과연 K산업이 위기일까? 우리 특유의 도전정신만 있으면 충분히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선, K조선은 탄소중립이 없었으면 진작에 중국 조선에 추월당했다. 그런데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천지개벽’ 때문에 세계 상선대 구조가 범용 유조선에서 우리가 경쟁력을 가진 액화천연가스(LNG)선, 친환경 메탄올 선박 등으로 급변하고 있다. 거기다 유럽이 에너지 수입을 러시아 가스에서 중동 LNG로 바꾸며 때아닌 ‘대박’이 터지고 있다.

수주 잔액 100조원을 돌파한 K방산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각국이 다퉈 국방비를 늘리는 고래 싸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서방 선진국·러시아·중국으로 삼분된 세계 무기시장에서 러시아가 무너진 공백을 중국이 빠르게 치고 올라간다. 소총, 박격포 등을 수출하다가 중동에 군사용 드론까지 수출하는 것이다. 이를 경계한 미국이 ‘중국 대항마’로서 K방산을 선택해 전략적 파트너로 삼고 공동생산을 하고 있다.

요즘 ‘메이드 인 차이나’는 두들겨 맞느라고 정신이 없다. 중국제 정보통신 장비, 드론, 항만용 크레인까지 현지국의 보안을 위협하는 장비로 낙인찍혀 서방시장에서 퇴출당하고 있다. 미국은 5세대(5G) 통신의 선두 주자 화웨이 통신장비를 쓰는 자국 통신사에 철거보조금까지 주며 퇴출시키고, 대신 한국 같이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 만든 ‘클린 네트워크’ 장비로 채우려 한다.

K배터리도 비슷한 반사적 이익을 누린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교묘히 우회해 포드와 기술 라이선싱 협약을 맺고 미국에 진출하려던 중국의 CALT가 진퇴양난이다. 미 의회가 중국 배터리의 미국 진출을 저지하겠다고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GM, 테슬라 등은 K배터리에 ‘러브콜’하느라 바쁘다. 미 에너지부 자료에 의하면 기가와트시(GWh) 기준으로 미국 배터리시장의 약 70%는 K배터리가 공급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얼마 전 미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법의 가드레일 조항으로 우리가 바싹 긴장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협상을 잘해 미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면 ‘10년간 중국 투자 금지’에서 최대 10% 정도까지는 생산 능력을 확장할 수 있게 운신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K반도체는 ‘표정관리’해야 한다. 어차피 탈중국이 대세다. 우리 가전, 스마트폰처럼 반도체도 언젠가 손 털고 나와야 한다. 그럴 때 K반도체에 크게 의존하는 베이징의 섭섭한 반응이 부담스럽다. 그런데 미국이 고맙게 악역을 해주고 있다. 당분간 차세대 반도체는 국내, 첨단반도체는 미국, 그리고 범용 반도체는 중국에서 생산하며 오늘의 위기를 내일의 기회로 만들면 된다.

경기 용인에 세계적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든다고 한다. 정치권이 철옹성 같던 수도권 규제를 풀어준 것이다. 이같이 K정치가 제 역할만 해주면 K산업은 위기의 돌풍을 타고 날아올라 세계 정상을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