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 보장된 낙폭지 재활용 자원…도난 사건 발생하기도
불화살·왕실 예복·건축에도 사용…일월오봉도 뒷면에도 낙폭지
낙방 과거 답안지가 군복 방한재로…조선시대의 종이 재활용
창덕궁 인정전에 있던 '일월오봉도'의 뒷면에 배접(褙接·종이나 헝겊 등을 여러 겹 포개 붙임)한 종이가 과거 시험 탈락자의 답안지인 '낙폭지'(落幅紙)로 확인돼 주목받은 적이 있다.

종이가 귀한 상황에서 병풍이나 서화류의 배접에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낙폭지의 용도는 그 외에도 다양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학술지 '민족문화연구' 97호에 실린 윤선영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과거 낙폭지(落幅紙)의 재활용 문화'를 보면 낙폭지는 배접지 외에도 의복, 기구, 기물 등에 사용됐고 건축물 부재로도 활용됐다.

우선 일월오봉도처럼 배접지로 사용된 사례는 경복궁 사정전에 있던 '쌍룡도벽화'의 화판 뒷면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배접된 낙폭지는 폐기됐고 사진만 남아 있는데 답안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1866년 정시(庭試·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실시한 과거)에 제출된 답안지인 것으로 파악됐다.

낙방 과거 답안지가 군복 방한재로…조선시대의 종이 재활용
낙폭지는 군수품으로도 사용됐다.

요충지인 서북지방에서는 군졸들이 추위를 이기도록 낙폭지를 면포에 싸서 솜 대신 넣어 만든 옷인 '지의'(紙衣)를 보급했다.

선조 38년인 1605년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 192권에는 "전일 내려보낸 낙폭지 2천 장과 개 가죽 등의 물품을 군사들 가운데 옷이 지나치게 얇은 자에게 지급하고 조정의 덕스러운 뜻으로써 회유한다면 따뜻한 솜옷을 입고 동고동락하는 듯한 감격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낙폭지가 군복 방한재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불화살의 일종인 '화전'(火箭)이나 가슴 부위를 보호하는 갑옷인 '엄심갑'(掩心甲), 군영의 비를 막는 '우구'(雨具), 비옷인 '우비'(雨備) 등에도 낙폭지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정식 도배를 하기 전에 애벌로 하는 초배에도 낙폭지가 사용됐으며 방과 마루 사이 등을 구분하는 문인 장지를 새로 만들고 보수할 때도 낙폭지가 유용했다.

조선시대 왕실은 중요한 서적·공문서 포장에 낙폭지를 사용했고 미술 분야에서는 병풍 제작 및 보수에 낙폭지가 활용됐다.

왕실 혼례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예복의 일종인 '활옷'의 종이심을 내시경 카메라로 살펴보니 여기에도 낙폭지가 있었다.

상주가 상복을 입을 때 두건 위에 덧쓰는 '굴관'(屈冠)이나 두건에도 낙폭지가 사용됐다.

낙방 과거 답안지가 군복 방한재로…조선시대의 종이 재활용
낙폭지는 옷이나 모자 등 형태를 빳빳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됐다.

종이 생산 능력이 한정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지질이 어느 정도 보장된 낙폭지는 훌륭한 재활용 자원이었고 낙폭지 관리는 중요한 임무였다.

고종 24년(1887년) 12월 6일 자 승정원일기를 보면 형조(刑曹)는 벽에 구멍이 뚫려 있고 낙폭지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낙폭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파수꾼을 어떻게 처리할지 처분을 기다리겠다고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형조는 조선의 6조 가운데 법률·소송·형옥(형벌과 감옥)·노예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종이가 귀했던 만큼 낙폭지 외에 여러 가지 폐 공문서도 재활용됐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병곡 권구(1672-1749)가 만든 세계사 교육용 교재인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배접지에서는 고문서 16점이 발견됐다.

이들 고문서는 1849년 금산군수의 첩정(牒呈·상관에게 올린 서면 보고), 서목(書目·책의 제목 등을 정리한 목록, 혹은 보고서의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 덧붙인 지면), 소지(所志·관청에 낸 청원 서면) 등 군역제도와 관련한 공문서였다.

조선 중기 화가 이징(1581∼?)이 그린 '사계영모도8첩병'(울산박물관 소장)에는 공문서, 한글 문서 등 699점의 고문서가 배접돼 있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