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랜드마크vs랜드마크] 런던아이와 서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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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기차나 선박, 기계처럼 철을 이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올 때, 철을 많이 생산하고 철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나라가 선진국의 지표로 사용되던 시절, 프랑스의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국력을 과시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끌며 박람회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 230m 높이의 에펠탑이다.
1893년 시카고 엑스포를 준비하던 미국은 1492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400주년을 기념하고 에펠탑을 능가하는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해 에펠탑처럼 정지된 철구조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거대 철구조물인 휠(wheel) 관람차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수직으로 움직이는 전망대에 놀랐으며 너도나도 휠 관람차를 타보려고 했고, 박람회는 또다시 성공을 거뒀다. 그 이후 휠 관람차는 유희시설의 단골메뉴가 돼 유원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유물이 됐다.
휠 관람차가 유희시설에서 도시의 상징물로 한 단계 격상된 것은 밀레니엄 시대의 영국 런던에 재등장하면서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런던시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런던을 새롭게 바라보는 의미로 런던의 눈(eye)이라는 이름의 휠 관람차를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만든 것이다. 지름 135m의 거대 구조물로 템스강 중앙에서 런던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건설됐다. 싱가포르, 라스베이거스, 두바이 등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에서 이를 모방했고, 더 큰 휠 관람차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생각해볼 점은 런던아이와의 유사성이다. 휠관람차라는 기능적 이유로만 본다면 버스나 전철처럼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을 수 있고, 서울랜드나 유원지 공원에 관람차를 설치하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런던아이는 더 이상 휠관람차라는 1차원적 유희적 의미를 갖는 시설이 아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런던을 재생하고 도시에 활력을 넣기 위해 제안된 도시 상징물이다. 유희시설의 놀이기구로 쓰이던 휠관람차를 100년이 지난 런던에서 도시의 상징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재생을 시킨 것이다. 그것은 휠관람차가 갖는 유희성을 재생시킨 것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상징물로서 그 의미를 재발견하고 시민을 위한 새로운 도시공간을 제공하려는 런던의 선택의 결과물이다.
서울링은 작년에 발표된 서울아이와는 구별된다. 런던아이와 같은 모양이지만 세계적 규모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미를 가졌던 서울아이 대신, 20여 년 전에 뉴 밀레니엄과 2002 월드컵을 기념해 추진되던 ‘천년의 문’ 프로젝트에서 당선된 서울링의 개념을 혼합한 아이디어처럼 보인다. 휠을 지탱하는 것이 자전거 바퀴살의 림 구조가 아니라 콘크리트 구조물로 링의 내부가 비워지는 모습이다. 링은 안을 비움으로써 한국의 전통적 가치인 비움의 의미를 내세우기도 하고, 그 내부를 디지털 장치에 의해 홀로그램 쇼를 보여주는 무대의 역할도 하게 한다. 서울링은 링을 도는 관람차의 기능을 그대로 받아들여 휠 관람차의 역할은 유지하고, 그것을 그레잇 선셋 관광자원으로 엮은 것이다.
런던과 서울이 다르고, 런던과 파리, 뉴욕이 다르기에 파리, 뉴욕에는 런던아이와 같은 휠관람차가 없다. 그들도 휠관람차의 유희성을 알고 시설을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이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런던아이를 쫒아 비슷한 것을 자기네 도시에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건축시설의 랜드마크적 성격이다. 그 시대에 그 도시에 맞는 랜드마크가 있다. 오늘날 도시는 바쁜 생활에 쫒겨 도시생활은 각박하고, 도시는 거대해져 자신의 생활영역 외에는 도시생활을 즐기기 힘든 구조로 바뀌고 있다. 또한 초고층 빌딩이나 스포츠 콤플렉스, 쇼핑센터, 박물관, 공연장 등의 도시기반 시설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잘 갖추어져 있어, 세계 어느 도시거나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그러기에 도시들은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줄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랜드마크를 갖기를 희망한다. 파리의 에펠탑이 그렇고,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 뉴욕의 자유의여신상이 그렇다.
그에 비해 서울은 인위적인 랜드마크가 부족하다. 많은 관광객들이 한국의 산이 많음에 놀라고, 도시와 산이 잘 어울리고 있음을 언급하여도 특정의 건축물이나 도시구조물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신격호 회장이 555m의 롯데타워를 지으면서, 우리나라가 언제까지 고궁만 가지고 관광자원화 할 것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롯데타워를 일종의 서울의 인위적인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목표가 달성되어 많은 사람이 롯데타워를 찾고 있지만 서울시민 모두가 그것을 서울의 랜드마크로 공감하는 것도 아니고 관람객들이 그것을 서울만의 명소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서울링은 분명 서울시민과 서울을 찾는 사람들에게 유희적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런던아이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왜 서울은 아직도 외국에서 하는 것을 베끼고 모방해야 하는지 낙담할지 모른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전에는 선진국을 따라 해야 하기에 선진국이 했던 경험을 반복할 수 있지만, 선진국이 되었다면, 파리나 뉴욕처럼 자기 도시의 브랜드를 그렇게 쉽게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으로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년의 문 당선작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20년 전의 뉴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의미를 갖는 건축조형물이 어떻게 20년 후에 다른 의미로 대체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질지 모르겠다.
서울링이 아직 기획의 단계라고 하니,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는 그냥 크기가 크거나 높이가 높은 것이 아니라, 20년 전 런던아이나, 20년 전 천년의 문이 아닌 미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감각을 지닌 멋진 발명품이면서도, 서울시민들에게 서울에 이런 것이 있다는 자부심을 줄 수 있는, 좋은 스토리를 가진 서울만의 랜드마크로서 만들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이재훈 단국대 건축학부 교수
1893년 시카고 엑스포를 준비하던 미국은 1492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400주년을 기념하고 에펠탑을 능가하는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해 에펠탑처럼 정지된 철구조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거대 철구조물인 휠(wheel) 관람차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수직으로 움직이는 전망대에 놀랐으며 너도나도 휠 관람차를 타보려고 했고, 박람회는 또다시 성공을 거뒀다. 그 이후 휠 관람차는 유희시설의 단골메뉴가 돼 유원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유물이 됐다.
휠 관람차가 유희시설에서 도시의 상징물로 한 단계 격상된 것은 밀레니엄 시대의 영국 런던에 재등장하면서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런던시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런던을 새롭게 바라보는 의미로 런던의 눈(eye)이라는 이름의 휠 관람차를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만든 것이다. 지름 135m의 거대 구조물로 템스강 중앙에서 런던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건설됐다. 싱가포르, 라스베이거스, 두바이 등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에서 이를 모방했고, 더 큰 휠 관람차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휠 관람차 도시의 상징물로 격상
이제 서울시도 그레잇 선셋이라는 한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계적 규모의 휠 관람차인 ‘서울링’을 건설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분명 88올림픽도로와 강변북로로 분리된 넓은 폭의 한강을 이어주며 멋진 석양과 서울시의 전체 조망을 보여줘 한강의 분위기를 바꿀 명소가 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그러나 생각해볼 점은 런던아이와의 유사성이다. 휠관람차라는 기능적 이유로만 본다면 버스나 전철처럼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을 수 있고, 서울랜드나 유원지 공원에 관람차를 설치하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런던아이는 더 이상 휠관람차라는 1차원적 유희적 의미를 갖는 시설이 아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런던을 재생하고 도시에 활력을 넣기 위해 제안된 도시 상징물이다. 유희시설의 놀이기구로 쓰이던 휠관람차를 100년이 지난 런던에서 도시의 상징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재생을 시킨 것이다. 그것은 휠관람차가 갖는 유희성을 재생시킨 것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상징물로서 그 의미를 재발견하고 시민을 위한 새로운 도시공간을 제공하려는 런던의 선택의 결과물이다.
서울링은 작년에 발표된 서울아이와는 구별된다. 런던아이와 같은 모양이지만 세계적 규모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미를 가졌던 서울아이 대신, 20여 년 전에 뉴 밀레니엄과 2002 월드컵을 기념해 추진되던 ‘천년의 문’ 프로젝트에서 당선된 서울링의 개념을 혼합한 아이디어처럼 보인다. 휠을 지탱하는 것이 자전거 바퀴살의 림 구조가 아니라 콘크리트 구조물로 링의 내부가 비워지는 모습이다. 링은 안을 비움으로써 한국의 전통적 가치인 비움의 의미를 내세우기도 하고, 그 내부를 디지털 장치에 의해 홀로그램 쇼를 보여주는 무대의 역할도 하게 한다. 서울링은 링을 도는 관람차의 기능을 그대로 받아들여 휠 관람차의 역할은 유지하고, 그것을 그레잇 선셋 관광자원으로 엮은 것이다.
도시에 맞는 랜드마크 만들어지길
그러나 서울아이나 서울링을 건설하려는 과정을 보면서 목적이 무엇인지, 서울의 경관, 그레잇 선셋의 의미를 살리려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인지 혼돈된다. 게다가 20년 전에는 서울링 같은 원형의 구조물이 전 세계에 없는 유일한 것이었지만(유사한 것으로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 정도를 들 수 있다), 지금은 매우 유사한 것을 중국 푸순시의 ‘생명의 고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링을 건설할 시기를 놓친 셈이다.런던과 서울이 다르고, 런던과 파리, 뉴욕이 다르기에 파리, 뉴욕에는 런던아이와 같은 휠관람차가 없다. 그들도 휠관람차의 유희성을 알고 시설을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이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런던아이를 쫒아 비슷한 것을 자기네 도시에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건축시설의 랜드마크적 성격이다. 그 시대에 그 도시에 맞는 랜드마크가 있다. 오늘날 도시는 바쁜 생활에 쫒겨 도시생활은 각박하고, 도시는 거대해져 자신의 생활영역 외에는 도시생활을 즐기기 힘든 구조로 바뀌고 있다. 또한 초고층 빌딩이나 스포츠 콤플렉스, 쇼핑센터, 박물관, 공연장 등의 도시기반 시설들은 어느 도시에서나 잘 갖추어져 있어, 세계 어느 도시거나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그러기에 도시들은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줄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랜드마크를 갖기를 희망한다. 파리의 에펠탑이 그렇고,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 뉴욕의 자유의여신상이 그렇다.
그에 비해 서울은 인위적인 랜드마크가 부족하다. 많은 관광객들이 한국의 산이 많음에 놀라고, 도시와 산이 잘 어울리고 있음을 언급하여도 특정의 건축물이나 도시구조물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신격호 회장이 555m의 롯데타워를 지으면서, 우리나라가 언제까지 고궁만 가지고 관광자원화 할 것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롯데타워를 일종의 서울의 인위적인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목표가 달성되어 많은 사람이 롯데타워를 찾고 있지만 서울시민 모두가 그것을 서울의 랜드마크로 공감하는 것도 아니고 관람객들이 그것을 서울만의 명소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서울링은 분명 서울시민과 서울을 찾는 사람들에게 유희적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런던아이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왜 서울은 아직도 외국에서 하는 것을 베끼고 모방해야 하는지 낙담할지 모른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전에는 선진국을 따라 해야 하기에 선진국이 했던 경험을 반복할 수 있지만, 선진국이 되었다면, 파리나 뉴욕처럼 자기 도시의 브랜드를 그렇게 쉽게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으로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년의 문 당선작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20년 전의 뉴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의미를 갖는 건축조형물이 어떻게 20년 후에 다른 의미로 대체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질지 모르겠다.
서울링이 아직 기획의 단계라고 하니,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는 그냥 크기가 크거나 높이가 높은 것이 아니라, 20년 전 런던아이나, 20년 전 천년의 문이 아닌 미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감각을 지닌 멋진 발명품이면서도, 서울시민들에게 서울에 이런 것이 있다는 자부심을 줄 수 있는, 좋은 스토리를 가진 서울만의 랜드마크로서 만들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이재훈 단국대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