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이달 말까지로 예정했던 연금개혁안 초안도 내놓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정치권이 개혁 방향을 국민연금 모수개혁에서 구조개혁으로 갑작스럽게 선회한 가운데 초안을 작성해야 할 민간자문위원회가 사실상 ‘보이콧’에 나섰기 때문이다.

21일 정치권에 따르면 특위 산하 민간자문위는 전날까지 특위에 낼 연금개혁안 보고서의 초안을 분야별로 나눠 제출할 예정이었다. 16명의 자문위원이 8개 분야로 나눠 작성하면 이를 묶어 이달 말 특위에 보고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마감일까지 절반 이상 분야에서 위원들이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자문위 내부에서는 정치권의 갑작스러운 개혁 방향 선회로 동력을 잃은 상황에 ‘보고서를 뭐하러 내냐’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금특위는 당초 국민연금의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개편하는 ‘모수개혁’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이달 초 ‘구조개혁’으로 방향을 바꿨다. 자문위에서 논의 중이던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 ‘숫자’가 거론되자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1월 말까지 내놓기로 했던 연금개혁 초안도 이달 말로 연기했다.

정치권에선 정부와 여당이 내년 총선 전에 연금개혁에 들어가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국회 특위도 활동을 지속할 동력을 사실상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야 특위 간사는 자문위 보고서에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등 구체적인 수치는 가급적 빼고 초안을 내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문위원 간 견해 차이가 극심해 합의안 도출이 어려워지자 내부에선 ‘자문위안’이 아닌, 위원들 실명을 적은 ‘개인 주장’으로 하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한 자문위원은 “핵심적인 내용은 다 빠진 상태에서 전문가 개인 의견 수준으로 자문위 보고서가 격하됐다”며 “이런 보고서는 안 내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많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자문위원은 “위원 실명을 안 적으면 ‘합의안’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고, 실명을 기재하는 건 부담을 느끼는 위원이 많다”며 “자문위안이 크게 의미도 없어진 상황에서 보고서를 내지 않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한 특위 관계자는 “특위가 초안조차 못 내거나, 위원들을 달래 초안을 만들더라도 속 빈 강정이란 지적은 피하기 힘들 것”이라며 “국회 논의가 이미 동력을 잃었기 때문에 개혁안은 이제 정부가 책임지고 마련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