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립기금 규모가 증가하면서 안정적 수익 기반을 마련하고자 해외투자를 지속해서 확대하는 등 투자 지역을 다양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 투자 비중이 높다.
2022년 11월말 기준 주식·채권·대체투자 등 금융 부문의 경우 국내 투자 51.6%(473.2조원), 해외투자 48.4%(444.6조원)로 국내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세부적으로 국내 주식 15.1%(138.6조원), 국내 채권 33.5%(308.1조원), 해외주식 27.8%(256.3조원), 해외채권 7.1%(65.5조원), 대체투자 16.1%(147.8조원), 단기자금 0.2%(1.5조원) 등이다.
특히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큰손 중의 큰손이다.
2022년 4분기 기준 국민연금 지분율이 10% 이상인 기업은 36곳이다.
이 중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인 기업은 KT(10.6%), DGB금융(9.6%), 하나금융(8.9%), 신한금융(8.8%), 포스코(8.7%), 네이버(8.2%), KT&G(8.0%), KB금융(7.9%) 등이다.
국민연금은 우리금융(7.9%)과 BNK금융(9.6%)에서는 2대 주주다.
이처럼 국내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국민연금이 주주 권한 행사를 무기로 제 목소리를 내려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투자대상 기업을 포함해 관련 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주주가치를 제고하고 투명경영을 유도해 국민연금의 장기적 투자수익을 올리고 이를 통해 공익을 실현하겠다는 게 표면적 취지이지만,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은 국민연금이 민간기업 경영에 지나치게 간섭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치' 논란도 벌어진다.
◇ '주인 없는 기업' 정조준…의결권 행사 강화 천명 "지금보다 (국민연금이) 조금 더 강화된 활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시장이나 각계 이해관계자 의견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국민연금 펀드 수익률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지배구조 수준이 향상되기를 바라고 국민연금도 이에 상응하는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다.
" 이동섭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수탁자책임실장이 지난 1월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김영식 의원 주최로 열린 '소유분산 기업 지배구조 세미나'에 참석해 소유 구조가 여러 주주에 분산된 기업들의 임원 재선임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밝힌 말이다.
소유분산 기업에 대한 주주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공언이다.
소유분산 기업은 확고한 지배주주가 없는 회사로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거나 주요 주주인 경우가 많아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도 불린다.
기금운용본부 수탁자책임실은 국민연금이 2018년 7월말 도입한 이른바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 행동 원칙)를 최일선에서 실행하는 책임부서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 지침으로 국민연금 같은 투자자가 큰 집의 집안일을 맡은 충직한 집사(Steward)처럼 고객이 맡긴 자산을 자기 돈처럼 여기고 주식을 보유한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선량하게 관리, 운용하도록 책무를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을 말한다.
국민연금이 총수 일가가 없거나 총수 지분율이 낮아 소유가 분산된 기업을 정조준하겠다는 움직임은 지난해 12월부터 이미 포착됐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해 12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외환위기 이후 기업지배구조 개선 논의가 주로 재벌총수에 초점이 맞춰져 왔는데, 이제 소유분산 기업의 합리적 지배구조는 어떤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며 "지배구조가 확고한 기업과는 다른 측면에서 국민연금이 소유분산 기업에 대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강화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지배구조 개선 등이 장기적으로 수익률 제고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발맞춰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도 지난해 12월 27일 임명되자마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김태현 이사장으로부터 스튜어드십코드 강화를 주문받았다면서 "KT와 포스코 같은 소유분산 기업들이 객관적·합리적이고 투명한 기준에 따라 CEO를 선임해야 불공정 경쟁이나 셀프 연임, 황제연임 우려가 해소되고 주주가치에 부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움직임은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인 KT에서 최근 현실화됐다.
KT는 이미 지난해 12월 28일 구현모 현 대표를 차기 대표이사 최종 후보로 단독 추천하기로 했지만, 국민연금의 강력한 경고 이후 이를 백지화하고 지난 9일 이사회를 다시 열어 차기 대표이사 선임 절차를 공개 경쟁 방식으로 재추진하기로 의결했다.
소유분산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강화는 지난달 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으로 더 탄력이 붙었다.
윤 대통령은 "과거 정부 투자 기업 내지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소위 '스튜어드십'이라는 것이 작동돼야 한다"며 "소유가 분산돼 지배구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에는 적어도 그 절차와 방식에 있어서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 소유분산 기업 CEO 견제 필요하지만…"낙하산 인사 등 관치 경계해야" 그간 소유분산 기업은 CEO 승계 과정에서 잡음을 낳는 등 지배구조와 관련해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실제로 일부 소유분산 기업의 경우 CEO가 취임하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로 이사회를 꾸려 참호를 구축하고, 강력한 임원 인사권으로 성과와 상관없이 연임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KT의 경우 2002년 민영화 이후 대표이사 공모제를 정관에 명시해 시행했으나 2006년 정관을 개정해 공모제 필수 조항을 삭제했는데, 그 이후 남중수·이석채·황창규 등 이전 대표이사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손쉽게 연임에 성공했고, 구현모 대표이사도 연임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사이 25년 전 한때 삼성전자를 제치고 국내 증시 시가총액 1위에 올랐던 KT의 기업가치는 지금은 40위에 머무르고 있다.
금융지주 CEO도 3연임, 4연임 등에 성공하며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해왔다.
김정태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2012년 회장직에 오른 뒤 2015년, 2018년, 2021년 잇따라 연임에 성공(4연임), 지난해 3월까지 무려 10년 동안 하나금융을 이끌었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도 2014년 11월 취임한 뒤 2017년과 2020년 두 번 연임하고 현재 9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렇다 보니 '금융지주 자리는 최소 3연임이 보장됐다'는 소리까지 나돌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코드 강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통한 정부의 낙하산 인사 등 관치 가능성을 경계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국민연금의 견제는 필수적이지만,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약하거나 총수가 없는 기업에만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강화될 경우 자칫 정부 입맛에 맞는 인사를 소유분산 기업의 CEO로 앉히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경제개혁연대는 이달 10일 'KT 이사회의 대표이사 선임 재추진 결정 관련 논평'에서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에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재벌 등 가족 지배기업에 대해서는 정부나 기관투자자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KT, 금융지주사와 같이 이른바 '주인 없는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만을 거론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민연금이 소유분산 기업을 포함해 주요 대기업의 지분을 유의미하게 보유한 상황인데 특정 기업만을 상대로 주주권을 행사한다면 그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어 "우리금융지주에서 손태승 회장이 연임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 결정된 것을 보더라도 국민연금이 낙하산 인사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며 "국민연금은 소유분산 기업 외에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가진 재벌 등 가족 지배기업에도 동일한 잣대로 적극적인 인게이지먼트(적극적 대화와 관여 활동)를 해야만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