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행동주의펀드 전성시대
2018년 4월 4일. 기자는 이메일 한 통을 열고 깜짝 놀랐다. 미국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자동차 등 3개사의 주식을 10억달러(당시 약 1조1000억원)어치 보유하고 있다는 ‘선전포고’를 보고 나서다. 엘리엇은 얼마 뒤 ‘본색’을 드러냈다. 현대차 등에 주당 3000원대이던 배당액을 2만원대로 늘리라고 압박했다.

벼랑 끝에 섰던 현대차그룹은 이듬해 3월 주주총회 표 대결을 앞두고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와 국민연금이 무리한 고배당을 요구한 엘리엇의 주주제안에 반대하면서다. 2020년 초 엘리엇은 손실만 본 채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짐을 쌌다.

전선 넓히는 행동주의펀드

당시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다. 기자는 ‘엘리엇 사태’ 초기 관련 기사를 쓸 때마다 ‘행동주의펀드 엘리엇’이란 표현을 썼다. 그런데 몇몇 기업인이 전화를 걸어 대뜸 따졌다. 단기간 고수익을 좇는 헤지펀드인 엘리엇에 ‘행동주의펀드’란 수식어를 다는 게 맞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행동주의’란 수식어 때문에 수익 극대화에 매몰된 헤지펀드가 마치 선의(善意)를 가진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당시엔 그랬다.

요즘 행동주의펀드가 국내 자본시장의 화두로 떠올랐다. 행동주의펀드가 기업 이사회와 손잡고 최대주주의 경영권을 사실상 박탈(SM엔터테인먼트)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망한 알짜 중견기업을 압박해 경영권을 매각하도록 하고 공개매수를 선언한 사례(오스템임플란트)도 등장했다. 행동주의펀드는 덩치를 키워 전선을 더욱 넓힐 태세다. 외국 펀드도 가세할 틈을 노리고 있다.

이쯤 되면 행동주의펀드 전성시대다. 기업들이 이를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일부 기업의 계열사 편법 지원(태광산업), 후진적 지배구조(SM엔터테인먼트), 느슨한 내부 통제(오스템임플란트), 쥐꼬리 배당(금융지주사) 등이 대표적 사례다.

기업의 새로운 생존 조건

그럼에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행동주의펀드가 어느 정도 정당성을 확보한 뒤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및 소각, 자산 매각 등을 요구하고 주가 급등에 따른 차익을 챙기는 ‘먹튀’를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툭하면 소모적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던 ‘불편한 추억’도 여전히 남아 있다.

행동주의펀드의 무리한 고배당 요구로 기업의 미래 성장동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 등 상당수 국내 제조기업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유보 현금을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 인수합병(M&A) 등에 쓰는 게 회사와 주주를 위해 나은 경우가 많아서다.

반기업 정서가 굳어지는 점도 걱정거리다. 수익 확대를 원하는 개미들 입장에선 주가를 올려주는 행동주의펀드가 든든한 우군으로 여겨진다. 반면 기업들은 ‘두들겨 맞아도 싼’ 대상으로 비칠 뿐이다.

여하튼 세상은 바뀌고 있다. 행동주의펀드가 요구하는 혁신과 성장, 합리적 지배구조, 주주환원 등은 이제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됐다. 동시에 순식간에 돌변해 사정없이 물어뜯을지 모르는 헤지펀드와 (법·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맞서야 하는 숙명도 안게 됐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내몰린 기업들의 건투(健鬪)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