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로 본 '시신 없는 살인사건'…경찰, 동거녀 시신 수색 계속
재판 넘겨진 이기영, 시신 없이 자백·혈흔만으로 유죄 인정될까
동거녀와 택시기사를 살해한 혐의 등을 받는 이기영(32)이 구속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5개월여 전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동거녀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해 일단은 '시신 없는 살인사건'으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기영이 살해한 피해자의 시신과 범행에 사용한 도구는 모두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이씨는 시신과 도구를 함께 천변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현재까지는 이기영의 자백과 간접 증거들만 있는 상황이긴 하나, 동거녀 살인 이후 거의 유사한 패턴의 택시 기사 살인사건을 저질렀기에 자백의 신빙성이 더해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재판 중 이기영이 진술을 번복한다면, 앞으로 이기영의 거주지 안방에서 발견된 비산(흩어진) 혈흔과 범행 전후의 정황 등만으로 유무죄를 다퉈야 한다.

살인 범죄의 직접적인 증거인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사건 중 가장 최근에 널리 알려진 사례는 '고유정 사건'이다.

전 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바다에 유기한 혐의로 기소된 고유정은 범행에 사용한 흉기와 정황 등으로 미뤄 계획범죄라는 것이 인정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또 다른 '시신 없는 살인사건'들의 역대 판례에서 죄의 유무 판단은 얼마나 달랐을까.

2008년 건설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를 구덩이에 파묻고 생매장해 살해한 혐의로 공소제기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면서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피해자의 사망 여부를 알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으나, 법원은 살인죄를 인정했다.

2012년 서울중앙지법은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간접증거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살인죄의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서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피고인의 말을 들었다는 증인(피고인의 전 동거녀)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고, 기타 간접사실이 증인의 진술을 뒷받침한다"며 징역 13년을 선고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리기도 했다.

반면, 피고인이 살인을 자백한 사실을 들었다는 핵심적인 증언이 확보됐음에도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판례도 있다.

2008년 대법원은 피해자를 차로 납치해 모처에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6년 넘게 실종된 상태인 피해자가 이미 사망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검사가 제출한 모든 증거를 보더라도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는 부족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대법원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범행 전체를 부인하는 피고인에 대해 살인죄의 죄책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사망 사실이 선결적으로 증명돼야 한다"며 "또한 피해자의 사망이 살해 의사를 가진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임이 증명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 넘겨진 이기영, 시신 없이 자백·혈흔만으로 유죄 인정될까
검찰은 이기영의 동거녀 살인 혐의 입증에 자신 있다는 입장이다.

이씨는 동거녀가 사망한 뒤 시신을 유기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지만, 계획을 세우고 살인을 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기영이 범행 직전 '먹으면 죽는 농약, 휴대전화 잠금 해제 방법' 등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 범행 직후 피해자의 휴대전화와 신용카드 등을 이용해 8천여만원을 편취한 점 등으로 미뤄 금전적인 목적의 '강도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은 지난 19일 이기영 사건 수사 결과 브리핑을 열고 "범행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확보돼 있다"면서 "죄에 상응하는 엄정한 형이 선고될 수 있도록 전담수사팀을 통해 철저한 공소 유지가 이뤄지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경찰의 협조를 받아 동거녀 시신 수색 작업을 당분간 계속할 예정이다.

이기영은 지난해 8월 4일께 파주시 집에서 집주인이자 동거하던 50대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공릉천변에 유기하고, 지난해 12월 20일에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접촉사고가 난 60대 택시 기사를 합의금을 준다며 집으로 데려와 살해한 뒤 시신을 옷장에 숨긴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두 건의 살인 범행 이후 피해자들로부터 1억3천여만원의 금전을 편취한 혐의 등도 받고 있다.

재판 넘겨진 이기영, 시신 없이 자백·혈흔만으로 유죄 인정될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