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침공계획 사전에 빼냈지만 개전후 우크라 정보국에 피살"
스파이 누명에 목숨 잃은 우크라 영웅…사후 때늦은 명예회복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이중첩자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획을 사전에 빼내는 공로를 세운 40대 금융전문가가 자국 정보요원의 손에 허망한 죽음을 맞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러시아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의심을 받아온 기관인 우크라이나 정보국(SBU)이 개전 직후 '러시아 스파이'란 누명을 씌워 그를 살해한 것이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6일째 되는 날이었던 작년 3월 2일 우크라이나측 평화협상단 일원인 데니스 키리예우가 수도 키이우 중심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키레예우는 머리 뒤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와 관련해 SBU은 그가 러시아를 위해 첩보행위를 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키리예우가 '배신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키리예우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입장은 곧 180도로 바뀌었다.

그는 영웅으로 예우 돼 우크라이나 초대 외교장관의 묘 곁에 묻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주권 수호를 위해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며 키리예우에게 사후 훈장을 추서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GUR)을 관할하는 키릴로 부다노우 국방정보부장은 "키리예우가 없었다면 키이우는 (러시아군에) 함락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스파이 누명에 목숨 잃은 우크라 영웅…사후 때늦은 명예회복
키리예우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2021년 봄 부다노우 부장의 요청을 받고 대러 첩보전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2010∼2014년) 당시 국영은행 고위직을 지낸 그는 우크라이나내 친러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러시아 군정보기관 관계자들과도 인맥을 지닌 마당발로 평가됐다.

부다노우 부장은 그런 인맥을 이용해 러시아 군정보기관에서 정보를 빼내달라고 호소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 이후 양국 관계에 회의를 느껴온 키리예우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하르키우를 경유해 러시아에 비밀리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인 키리예우는 2021년 가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준비 중이란 사실을 알아내 처음으로 경고음을 울렸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공포가 커지면서 주변인들이 해외로 도주하는 와중에도 "(지금 떠난다면) 나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것 같다"며 남은 그는 침공 바로 전날인 2월 23일 오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같은 날 오전 침공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부다노우 부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키리예우는 러시아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무엇일지도 알아내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공수부대의 키이우 인근 공항 점령 시도를 방어하는 등 초기 대응에 성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부다노우 부장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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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첩보활동을 벌여온 사실이 들통날 위험에도 같은 달 28일 벨라루스에서 진행된 1차 평화협상에 우크라이나 측 협상단원으로 참여했다.

러시아 측 협상단원 중 두 명과 친분이 있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2차 협상을 하루 앞둔 작년 3월 2일 SBU 방첩부서장의 호출에 집을 나선 그는 몇 시간 뒤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가 이중 첩자란 사실을 모른 SBU가 그를 실수로 제거한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친러 유력자들이 '배신'에 대한 보복으로 SBU내 인맥을 이용해 그를 살해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작년 7월 SBU 수장을 해임하고 러시아의 침공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는 SBU 고위급 인사 수십 명을 교체하는 조처를 했다.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정부가 조사에 착수한 정부 당국자의 친러행위 의혹 사건은 650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