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시장에 상장된 방위산업 부품업체 휴센텍은 지난해 9월 7일 전환사채(CB)를 발행해 500억원을 조달했다. 그중 300억원을 다른 법인 출자에 쓰겠다고 공시했다. CB 인수자는 자기자본 기준 국내 6위 증권사 메리츠증권이었다. 휴센텍은 그로부터 두 달 전인 7월 리튬플러스 창업자 전웅 대표를 등기이사로 선임했다. 9월 3일에는 리튬플러스가 발행한 신주인수권부사채(BW) 2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시장은 휴센텍이 수산화리튬 제조사 리튬플러스를 인수하는 수순으로 해석했다. 주가는 리튬 테마를 타고 급등했다. 하지만 휴센텍은 CB를 발행해 조달한 500억원 중 단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감사인 의견거절로 주식거래는 정지됐고, 경영진은 횡령·배임 혐의로 고소당했다.
메리츠證 'CB 공장'서 사채놀이…무위험·고수익 머니게임 올라타
수수께끼 같은 자금조달의 진실이 드러난 건 지난 4월 정정공시를 통해서다. ‘무늬만 자금조달’이었다. 메리츠는 500억원을 휴센텍에 납입하자마자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안정채권을 사도록 한 다음 담보로 잡았다. 3월 상장폐지 이슈가 불거지자 담보권을 행사해 원금을 회수했다. 이 과정에서 메리츠는 최소 32억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은행의 ‘꺾기’(기업에 돈을 빌려준 뒤 다시 예치하도록 강제하는 행위)나 사채업자의 ‘찍기’(유상증자로 돈을 잠시 회사에 넣어줬다가 빼가는 행위)를 연상시키는 거래”라고 말했다.

‘CB 공장’에 수천억원 ‘무늬만 투자’

대형 증권사마저 ‘CB 공장’을 활용한 무자본 인수합병(M&A) 세력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해당 세력과 이해를 일치시키면 무위험으로 수수료 및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휴센텍 대주주가 쓰지도 못할 돈을 조달하기 위해 CB를 발행한 건 CB 콜옵션(매수선택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다. 무자본 M&A를 통한 테마로 주가 부양에 성공하면 CB를 되사와 주식으로 전환해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츠는 휴센텍 CB의 70%를 되살 수 있는 콜옵션을 대주주에 넘겼다. 일반 CB 콜옵션 비중보다 두 배 높은 수준이다. 계획대로 주가가 급등했다면 메리츠도 남은 CB 30%를 주식으로 전환해 추가 수익을 올렸을 수 있다. 회사의 미래나 소액주주 보호는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메리츠가 지난해 9월 이후 집행한 ‘무늬만 CB 투자’는 휴센텍을 포함해 3500억원이 넘는다. 얍엑스(500억원) 노블엠앤비(300억원) 금호전기(300억원) 에이치앤비디자인(270억원) 세종메디칼(200억원) 등이다. 특히 작년 말 금융당국이 CB 콜옵션 및 리픽싱(전환가격 조정) 규제 강화를 하기 직전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KH그룹·에디슨 조력자 역할

메리츠증권은 KH그룹과 에디슨모터스에도 적지 않은 자금을 댔다.

KH그룹에는 올초 강원 알펜시아리조트 인수 자금을 지원했다. KH필룩스·IHQ(각각 350억원), KH건설·KH전자(각각 150억원) 등이 발행한 CB 1000억원을 인수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알펜시아리조트의 부동산 자산을 담보로 잡았다. 역시 무자본 M&A에 자금을 제공하면서 손실 리스크는 최소화한 무위험 투자였다.

메리츠는 또 6월 IHQ(200억원), KH건설(100억원) 등의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인수했다. 해당 주식에는 KH그룹 계열사가 상호 보증 형태로 부동산 자산 등을 담보로 제공했다.

메리츠는 에디슨모터스에 자금을 지원한 ‘큰손’ 투자조합에 자금을 융통해주기도 했다. 에디슨EV(현 스마트솔루션즈)가 인수한 유앤아이(현 이노시스)는 7월 한투오, 여의도글로벌투자 등을 대상으로 600억원 규모의 CB를 발행했는데, 메리츠증권이 발행 당일 CB 전량을 장외에서 인수해줬다. 동시에 CB 80%에 대한 콜옵션을 와이에스에이치홀딩스에 넘겼다. 이 거래의 핵심 인물인 한모씨 등은 에디슨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과거에도 ‘무늬만 BW’ 인수로 징계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과거 사채업자나 저축은행이 했던 ‘머니게임’의 돈줄 역할을 증권사들이 대신하고 있다”며 “금융감독원이 ‘CB 공장’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메리츠증권은 2014년에도 ‘무늬만 BW 투자’를 주도하다 기관주의 징계를 받은 전력이 있다. 빌려준 돈을 예금으로 예치하게 한 후 질권을 설정했다. 다만 이번에는 ‘회사가 동의하면 자금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포함시켰다. 한 변호사는 “자본시장법 위반을 회피하기 위한 조항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며 “대주주는 배임, 증권사는 배임 동조 소지가 다분하다”고 말했다.

메리츠증권 관계자는 “위험 자본을 공급하되 리스크를 면밀히 검토해 투자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 증권사가 하는 일”이라며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기업들이 CB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투자자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최석철/조진형 기자 dols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