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달러가 좀 있는데 원화로 바꿔 한국 주식을 좀 사면 어떨까?”

미국 뉴욕에 사는 재외 동포들이 종종 물어오는 말이다. 달러 강세로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한국 증시도 크게 내린 데 따른 것이다. 사실 달러로 한국에 투자하기엔 좋은 시기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달러는 2000년대 초반과 1980년대 중반에 기록한 정점 수준에 달했다. 뭔가 위기가 터지지 않는다면 지금이 고점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코스피200의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은 각각 8.30배, 0.83배(10월 20일 기준)까지 떨어져 미 증시에 비하면 ‘바겐세일’ 수준이다.

'미로' 같은 외국인 ID 제도

2021년 기준 미국엔 263만 명의 재외 동포가 살고 있다. 이들이 ‘귀한’ 달러를 한국에 투자한다면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환율 방어와 주가 하락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정부가 발 벗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기자의 대답은 “어렵다”는 것이다. 영주권자나 주재원 등 한국 국적을 가진 이는 문제가 없지만, 미국 동포의 60%가량인 153만 명의 시민권자는 사실상 투자할 길이 막혀 있어서다.

금융당국이 운용하는 ‘외국인 투자등록(ID) 제도’ 때문이다. 외국인 취득 한도 관리 및 거래 동향 파악을 위해 인적 사항을 금융감독원에 사전 등록하는 제도다. 시민권자인 미국 동포가 국내 주식을 사려면 한국 증권사와 ‘상임대리인 계약’을 맺은 뒤 여권이나 시민권증명서, 제한세율적용신청서, 일반투자자정보확인서를 금융감독원에 내야 한다. 그러면 1주일 정도 걸려 외국인 ID를 발급받을 수 있고, 그 이후 증권사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 그리고 개별 주식을 사고팔 때마다 건별로 금융당국에 보고해야 한다. 이렇게 성가시다 보니 1992년 이후 운용해온 이 제도에 등록한 외국인이 작년 말 기준 5만1185명(기관투자가 포함)에 그친다.

한국이 선진시장 아닌 이유

물론 금융당국 입장에서 외국인 투자 한도 관리, 자금 추적(자금세탁 방지) 등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내세워 투자를 시작하기도 어렵게 틀어막아 놓은 건 행정편의주의다. 미국은 자금세탁 방지 의무 등을 각 금융사에 맡긴다. 금융사가 스스로 외국인 계좌 개설을 허용할 것인지 판단한다. 비용보다 이익이 크다고 판단한다면 할 수 있도록 열어놓은 것이다.

외국인 ID 제도는 한국 증시가 MSCI선진국지수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로도 꼽힌다. 여러 개 펀드를 운용하는 외국 기관투자가가 한국에 투자하려면 펀드별로 외국인 ID를 받아야 한다. MSCI가 여러 차례 문제를 지적하자 2016년 기관투자가별로 통합계좌(옴니버스 계좌)를 허용했지만 매매 내역 신고 등 후선업무는 여전히 펀드별로 처리해야 한다.

외국인의 유가증권시장 내 시가총액 비중은 지난달 22일 30.38%까지 떨어져 10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한국 주식의 매력이 떨어진 게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투자를 가로막는 행정편의주의도 한몫을 차지할 것이다. “달러를 바꿔 삼성전자 주식을 사면 어떻겠냐?”고 물었던 한 동포는 다음달 중순 한국에 들어간다. 외국인 ID를 만들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서다. 모든 동포나 외국인 투자자가 이렇게 한국 투자에 열의를 갖고 있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