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르벨이 2018년 팔레 드 도쿄에서 전시한 '솔루블 포이즌'. ADAGP 제공
장 자크 르벨이 2018년 팔레 드 도쿄에서 전시한 '솔루블 포이즌'. ADAGP 제공
‘독일의 대표적 현대미술 축제’로 불리는 베를린 비엔날레의 주최 측이 전시회 운영 미숙으로 결국 사과했다. 미군에 의해 학대당한 이라크 포로들이 담겨진 사진전 옆에서 전시회를 열기 싫다는 작가들의 요구가 빗발치면서다.

독일 카셀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 현대미술 전시회’ 카셀 도큐멘타에서도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작품이 있다는 이유로 비판이 제기되자 사무총장이 물러나야했다. 세계의 주요 현대미술 전시회들이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을 격렬하게 치르며 예술계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다.

베를린 비엔날레 위원회는 16일(현지시간) “이라크 작가들의 작품을 르벨의 작품과 가까운 곳에 배치해 큰 고통을 준 데 대해 죄송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프랑스 예술가 장 자크 르벨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 미군이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하는 모습의 사진들을 ‘포이즌 솔루블’(Poison Soluble·2013)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

사진에는 미국 군인들이 이라크 국민의 알몸 시체 더미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등의 잔인한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미군이 포로를 고문하거나 성폭행하는 사진도 전시됐다. 르벨은 이들 사진을 크게 확대하고, 미로처럼 설치된 벽면에 걸어놨다.

논란이 거세진 건 지난달 말부터다. 이라크 출신의 큐레이터 리진 사하키안은 예술 전문 잡지 ‘아트포럼’을 통해 르벨의 작품을 전시하기로 한 베를린 비엔날레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이라크 희생자들에 대한 아무런 존중 없이 잔혹하게 살해된 시체를 상품화했다”며 “사진에 담겨있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전시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하키안은 사자드 아베스, 라이드 무타르 등 베를린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일부 아티스트들이 르벨의 작품이 있는 곳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사실도 공개했다.

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미군의 무자비한 학대를 고발하려 했던 작가의 의도를 감안해도 피해 장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하키안의 성명을 지지한 이라크 예술가 레이스 카림도 “고통을 예술에 이용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고 했다.

뉴욕타임즈(NYT)의 미술 비평가 시다르타 미터도 전시 리뷰 기사에서 “반인종주의와 반식민주의 예술이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 보여주는 객관적인 교훈”이라고 평가했다. 베를린 비엔날레는 개막 당시 르벨의 작품 앞에 커튼과 함께 “인종차별의 트라우마와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주의해달라”는 경고문을 달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논란이 커지자 베를린 비엔날레 위원회는 “상황의 민감성을 과소평가했다”며 진화에 나섰다. 위원회는 사과문을 통해 “사전에 전시 배치를 논의하지 못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다만 포이즌 솔루블 전시 철회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를린 비엔날레의 수석 큐레이터이자 2018년 팔레 드 도쿄에서 르벨과 함께 전시를 진행했던 카델 아티아는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적 범죄를 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 사진은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전시돼야만 한다”고 했다.

베를린 비엔날레는 포이즌 솔루블의 이미지를 언론에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감한 이미지가 온라인상에서 잘못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미술 전문 매체 아트뉴스는 설명했다. 올해로 12회째인 베를린 비엔날레는 지난 6월 11일 개막했다.

카셀 도큐멘타는 6월 18일 개막과 동시에 미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인도네시아 예술그룹 타링 파디의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작품이라는 비판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작품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결국 해당 전시물은 철거됐고, 지난달 17일 사빈 쇼만 사무총장도 카셀 도큐멘타에서 물러났다. 카셀 도큐멘타는 9월 25일까지 열린다.

예술작품 표현의 수위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현대미술 전시회들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지고 있다. 카셀 도큐멘타에는 개막 50일 동안에만 41만명이 찾았고 베를린 비엔날레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선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