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바이오로직스가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인 세포·유전자 치료제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의 전략 수정에 나섰다. 본격적으로 뛰어들기에는 시장이 아직 충분히 커지지 않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앞다퉈 세포·유전자 치료제 CDMO 사업에 뛰어드는 가운데 나온 움직임이어서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진다.

삼바, 멀티모달리티플랜트 사실상 보류

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인천 송도 약 1만㎡(약 3000평) 부지에 멀티모달리티플랜트(MMP)를 지으려던 계획을 사실상 보류했다. MMP는 다양한 형태의 세포·유전자 치료제를 생산할 수 있는 형태의 공장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11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IFEZ)으로부터 해당 부지를 사들였다. 1~4공장이 있는 제1캠퍼스 길 건너에 있는 ‘자투리’ 부지다. 부지 매입 후인 올 1월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는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 “5공장은 MMP로 건설할 계획”이라며 “연내 착공하겠다”고 말했다.
삼바, 세포·유전자 CDMO 공장 착공 사실상 보류...배경은?
이 계획은 반년여 만에 변곡점을 맞았다. 지난달 35만㎡(약 10만평) 규모의 제2캠퍼스 부지를 추가 매입하면서다. 회사는 제2캠퍼스에 기존 1~4공장과 마찬가지로 항체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5공장)을 짓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별도 부지에 세포·유전자 치료제 생산 용도의 5공장(MMP)을 지으려던 기존 계획은 수면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제2캠퍼스 내 5공장 착공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세포·유전자 치료제 CDMO 시장의 ‘파이(규모)’가 충분히 커지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공장을 짓기에는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굳이 지금 시점에서 공장을 짓기 시작할 유인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제2캠퍼스 부지 매입과 맞물려 전반적인 전략에 변화가 생겼다”며 “MMP 건설 계획이 백지화된 건 아니다”고 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MMP를 건설하려고 사들인 부지는 매입 이후 9개월째 공터로 있다.

적극적인 SK와 바이오벤처

다른 국내 업체들은 앞다퉈 세포·유전자 치료제 CDMO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SK그룹이 적극적이다. SK그룹의 투자형 지주사인 SK는 CDMO 통합법인인 SK팜테코를 통해 세포·유전자 치료제 CDMO 회사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연초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CBM에 3억5000만달러(약 4200억원)를 투자했다. 앞서 사들인 프랑스 이포스케시도 세포·유전자 치료제 위탁생산(CMO) 업체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세포·유전자 치료제 CDMO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씨셀은 지난 4월 미국 세포·유전자 CDMO 업체인 바이오센트릭을 7300만달러(약 900억원)에 인수했다.

메디포스트 강스템바이오텍 등 바이오벤처들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바이오벤처 관계자는 “세포치료제를 개발해 실제 상업화에 성공한 경험이 CDMO 사업에 안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온도차 드러나는 사업 전략

세포치료제는 줄기세포 T세포 NK세포 등을 활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기전이다. 환자의 T세포를 추출해 유전자 변형을 가한 후 다시 몸 속에 주입해 암을 치료하는 키메릭항원수용체(CAR) T세포 치료제가 대표적이다. 환자의 세포가 아니라 건강한 사람의 세포 등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유전자 치료제는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막거나, 새로운 기능을 하는 유전자를 삽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치료한다.

화학 치료제나 현재 널리 쓰이는 바이오 의약품인 항체치료제와 비교해 보다 근본적인 치료법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승인된 세포·유전자 치료제는 88개다. 세포치료제가 55개고, 유전자 변형 세포치료제 9개, 유전자 치료제 7개 등의 순이다.

시장조사기관 이밸류에이트파마에 따르면 세계에서 약 3343건의 세포·유전자 치료제 임상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70%가 넘는 2362건이 전임상(1794건) 또는 임상 1상(568건)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아직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임상 수는 많지만 상업화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생산 수요가 크지 않다.

세포·유전자 치료제가 ‘대세’가 될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대규모 위탁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업화 제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승인받았더라도 가격이 비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는 지난 6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바이오USA에서 “세포·유전자 치료제는 아직 굉장히 초기 단계”라며 “(CDMO 업체가) 언제 매출과 이익을 낼 수 있을지 뚜렷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환자보다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더라”며 “시장이 크지 않다는 얘기”라고 했다.
삼바, 세포·유전자 CDMO 공장 착공 사실상 보류...배경은?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대처하는 곳은 SK다. SK는 적극적인 인수합병(M&A) 전략을 펴고 있다.

이동훈 SK 바이오투자센터장(부사장)은 연초 기업설명회(IR)에서 “세포·유전자 치료제는 수요 측면에서 상업용 생산 물량이 적은 게 사실”이라면서도 “임상 파이프라인(후보물질)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상업용 치료제 생산설비의 부족 사태가 조만간 올 것으로 예상했다.

당장 수요는 적지만, 향후 수요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 우수한 생산설비를 미리 갖춰놔야 한다는 판단이다.

삼성바이오 전략은

업계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MMP 같은 세포·유전자 치료제 생산 공장을 당장 짓기보다, 항체의약품 생산을 지속하며 세포·유전자 치료제 시장 추이를 보다가 ‘똘똘한 매물’이 나오면 M&A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항체치료제 수요는 여전히 견조하다”며 “굳이 돈 잘 버는 사업(항체의약품)을 두고 시장이 아직 크지 않은 세포·유전자 치료제 사업에 전력을 분산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존림 대표는 바이오USA에서 “초기에 많은 회사들이 세포·유전자 치료제 생산 공장을 지었지만, 이제는 매물로 내놓고 있다”면서 “2024년까지는 자본시장 사정도 안 좋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 CDMO 회사들은 앞으로 2년 간을 (자체 수익으로) 버텨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과 미국 모두 마찬가지”라며 “그러면 우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