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동안 몰랐다…'로마 조각상' 놀라운 진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2000년 동안 몰랐다…'로마 조각상' 놀라운 진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https://img.hankyung.com/photo/202207/01.30784947.1.jpg)
그럼 이제 시선을 강탈하는 오른쪽 조각을 얘기해 볼까요. 왼쪽 조각에 색을 입혔을 뿐인데 영 시원찮네요.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물감을 칠한 것 같기도 하고, 망해가는 놀이공원에서 색이 벗겨져 가는 싸구려 조형물 같기도 하고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파비오 배리가 남긴 코멘트가 걸작입니다. “너무 촌스러운데요. 여장남자가 택시를 잡으려는 모습처럼 보여요(like a cross-dresser trying to hail a taxi).”
사실 2000년 전 이 조각상이 만들어졌을 당시, 실제 조각상은 왼쪽보다 오른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순백의 대리석 조각이었던 줄 알았던 작품이 사실 ‘풀 컬러’였다는 거죠. 다른 대부분의 그리스·로마 조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들어졌을 당시엔 알록달록하게 채색돼 있었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왜 그리스·로마 조각이 무조건 희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맨눈으로도 보이는 색칠 자국인데…
이야기는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독일 뮌헨대학교 고고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빈첸츠 브링크만은 그리스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체에 자외선을 비춰 표면의 상태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특수 기구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조명을 비추자 다양한 색을 칠한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됐습니다.깜짝 놀란 브링크만은 특수 조명으로 다른 조각상들을 비춰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죠. 대부분의 조각상에 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더 놀라운 건, 그에겐 이제 조명 없이 맨눈으로도 색칠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브링크만이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저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이 사라졌을 뿐인데, 모든 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브링크만은 조각들의 색 연구를 계속하다가 1990년대 들어 고고학자인 아내와 함께 그리스·로마 조각들의 원래 색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저 백설공주 의상을 입은 것 같은 아우구스투스상은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누가 봐도 결과물이 보기 좋지는 않지요. 실제 색칠돼있던 모습은 분명히 저것보다 훨씬 진짜처럼 보였을 겁니다.


지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채도 : 색이 있는 고대 조각상’(Chroma: Ancient Sculpture in Color) 전시도 이런 전시의 일환입니다. 지난 5일 개막했고, 내년 3월 26일까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리스·로마 조각상이 흰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런 오해는 사실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리스·로마 조각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건 르네상스 시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었던 조각상들은 1000년 넘는 시간을 견디며 색을 잃었습니다. 그나마 색이 남아있던 조각상들도 발굴 과정에서 빛과 공기에 노출됐고, 흙을 털어내는 청소 과정까지 거치면서 금세 물감이 벗겨져 버렸죠.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리석 산지인 이탈리아의 카라라까지 가서 흰 대리석을 직접 사오기도 했죠. '피에타'를 비롯한 그의 걸작들은 이런 오해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얀 대리석이 몸의 형태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아무래도 색이 있으면 조각의 세부적인 형태에는 눈이 덜 가게 되죠.
문제는 이런 편견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는 겁니다. 발굴 기술이 발전한 18~19세기, 그리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 색이 있는 조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말까지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졌고요.
조각에 색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나는 원래부터 그리스·로마 조각상에 색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기 이 가슴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과 그 흰색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 사례’라는 편견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버렸던 겁니다. 근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흰 것일수록 아름답다”고 한 게 대표적입니다. 괴테는 “야만인이나 무식한 사람, 어린이들은 선명한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조각상에 물감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가 되면 이들은 “그리스가 등장하기 전 다른 문명의 유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사라 본드 교수는 “당시 학자들은 그리스·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미술이 이집트 등 다른 문화권의 미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흰색 조각상을 그 증거로 여겼다”며 “인종차별적인 인식이 눈을 가린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대로 당시 사람들에게 흰색은 죽은 자가 있는 지하세계를 상징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숀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요즘 그리스·로마 조각상들을 본다면, 자신들이 '귀신의 집'에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