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모 공중파 법률프로그램에 부동산 부분의 법률자문을 담당하면서 방송작가들의 방송대본 작성과정에 법적인 자문을 하고 있다. 다음의 사안은, 며칠 전에 이 프로그램 작가로부터 받은 방송자문내용이다.
상가점포 임대차계약기간 도중에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생긴 임차인 乙은, 임대인 甲에게 자신의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중도해지를 부탁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임대인 甲은 비록 계약기간이 만료되지는 않았지만 임차인 乙의 이런 사정을 공감하고 '일단 다른 세입자를 구해보자'고 긍정적으로 답한다. 그 후 마침 이 점포에 들어오겠다는 세입자가 나타나 임대차계약이 체결되고 그 계약금까지 기존 임차인 乙에게 건네진다.
그러나, 그 후 새로 들어오기로 예정된 세입자는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계약금몰수를 전제로 이 임대차계약을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기존 임차인은, 새로운 임대차계약이 체결되자 기존 임대차계약은 완전히 끝난 것으로 믿고서 임대인으로부터 받은 계약금으로 다른 곳에 새로운 점포까지 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양측의 주장이 부딪히게 된다. 임차인 乙은 임대차계약종료를 이유로 임대인 甲에게 나머지 보증금의 반환을 요구하지만, 반대로 임대인 甲은, 새로운 임차인이 구해지는 전제로 기존 임대차계약을 중도해지하는 것으로 약속한 것인데, 새로운 임대차계약이 계약이행 도중에 파기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임대차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음은 물론이고,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월세도 계속 부담하라고 주장한다. 누가 주장이 타당한 것일까?
방송대본으로 만들어진 사안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자주 발생하는 사례다. 이 사건 골자는 기존 임대차계약이 합의해제되었지의 판단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판단이 쉽지 않다. 법리적으로 복잡해서가 아니라 사실관계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사안을 법리적으로 하나씩 풀어보자. 임대차계약에서 정한 계약기간은 엄연히 있기 때문에, 임대차계약이 중도에 합의해제되었다는 입증책임은 임차인에게 있다. 이렇게 입증책임부터 거론하는 것은 입증책임이 법원판단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분쟁이 되고 있는 사안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판사로서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나타난 증거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입증책임론이다. 민사소송법상으로 입증(立證)이라는 것은, 법관으로 하여금 확신을 얻게 하는 당사자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입증책임이 있는 사람이 입증해야 될 부분에서 법관에게 확신을 가지는 상태에까지 이르지 못하게 하면 입증에 실패해서 재판에서 불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안은 임차인에게 입증의 부담이 있는 사건이기는 하지만, 사안의 전체적인 분위기상으로 볼 때 ‘새로운 임차인이 들어오면 임대차계약을 중도해제시켜주겠다’는 임대인의 의사표현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에, “중도해제 합의”라는 입증에 상당한 정도 임차인이 다가간 것은 틀림없다는 점에 판단의 어려움이 있다. 새로운 임차인과 임대차계약이 체결되면서 다른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채 확정적으로 중도해제하겠다는 의사를 임대인이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임차인과 단순히 계약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종적으로 임차인이 입점하는 것을 조건으로 중도해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인지가 판단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판단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지만 필자는, 기존 임대차계약이 합의해제된 것으로 자문했다. 새로운 임차인으로부터 받은 계약금을 기존 임차인에게 건냈다는 것은 기존 계약을 정리하겠다는 확실한 의사표시가 아닐까하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 사안처럼 사실관계 판단이 어려운 분쟁이 너무나 많다. 그 원인은 거의 대부분 합의내용이 정확치 않기 때문이다. 서로간의 합의를 서면화하지 않고 말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서면으로 작성된 내용마저도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문제는 서로간의 관계가 원만할 때는 잠재해 있다가 관계가 악화되면서 분쟁의 불씨가 된다.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런 허점을 이용해서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감정적인 골은 더 깊어진다. 재판하는 법원으로서도 이런 모호한 사실관계 정리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안이 정리되지 않다보니 본의아니게 잘못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재판에서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 모두 사법부를 불신한다.
서로간의 의사표시를 정확하게 하는 사회적인 관행,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인 행복을 위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문제가 아닐까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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