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 라벨의 촘촘한 규제 목록은 ‘규제공화국’ 실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한경 4월 6일자 A25면 보도). 8개 정부 부처가 제각각 행사하는 규제들을 살펴보면 주류 제조·판매 사업자가 아니더라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더구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산업통상자원부는 2개씩 복수 규제를 가하고 있어 라벨에 표시된 것만 무려 10개에 달한다.

식약처는 칼로리 표시를 의무화했고, 환경부는 ‘재활용 용이성 등급표시 규정’을 신설해 주류 규제 부처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반품·교환 사항을, 여성가족부는 청소년보호법 조항을 이 작은 라벨에 담으라고 요구한다. 행정기관도 아닌 국회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표시 의무화를 검토 중이라니 ‘공무원 완장질’에는 끝이 없다는 업계의 하소연이 절로 나온다. 개별로 떼어놓고 보면 나름대로 명분이 없지 않지만, 겹겹의 제한·감시·감독·징계를 묶어놓으면 괴물이 되고 마는 것이 행정규제다.

더 큰 부담은 규제 목록이 수시로 변한다는 점이다. 이 부처 저 기관이 경쟁적으로 내놓은 규제 내용을 라벨에 바로 표시해야 하는데, 이게 기업엔 모두 추가 비용이다. 라벨을 새로 만드는 데 매년 수십억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 캔맥주는 외국 본사와 연락하며 용기 자체를 바꿔야 한다.

술병 라벨은 과잉 규제의 한 단면일 뿐이다. 건축 유통 등 분야로 가면 부처들이 합동으로 나선 벌떼 규제들이 곳곳을 날아다닌다. 법령 외에 고시, 가이드라인 등의 이름으로도 기업들을 옥죈다. 여기에 획일적 주 52시간제, 탄력근로제 금지, 경직적 파견·도급제 등 고용시장의 규제들이 겹겹이 둘러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120조원 용인공장 건설이 3년째 제자리인 것도 규제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규제는 공무원 숫자, 법령 증가에 비례해 늘어난다. 정부가 커질수록, 입법이 활발할수록 사업자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 출범 전이라도 비상한 각오로 ‘작은 정부’에 대한 로드맵을 내놔야 할 것이다. 한덕수 총리 후보자도 본인이 공동위원장을 맡게 될 규제개혁위원회가 지난 24년 동안 어떤 성과를 내놓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규제개혁을 위한 아이디어들은 다 나와 있다. 규제일몰제도 있고 트럼프 행정부의 ‘원 인, 투 아웃제(기존 규제 둘을 없애야 한 가지 신설)’도 해볼 만하다. 관건은 확고한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