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국 딜레마’가 한국 외교에 주는 시사점 [신범식의 국제정치 읽기]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에서 형성되고 있는 지정학적 활성 단층대의 서쪽에 있는 대표적 ‘중간국(中間國)’이다. 그 반대편에 한반도가 있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 한민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운명이 결정됐던 것처럼 수십 년이 지난 2022년에 우크라이나의 의지가 무시되고 그 미래가 결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 사태가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비극적 교훈은 핵심 이익에 위협이 가해질 때 강대국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경험은 이런 환경적 요인에 대한 고려 못지않게 중간국 외교의 본질과 관련된 중대한 교훈을 준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지정학적 중간국의 갑작스러운 외교·안보 노선의 변경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전방위적 미·중 전략경쟁의 상황에서 정밀하게 계산되고 준비되지 않은 외교 지향 및 균형점의 변동은 심각한 지정학적 손실로 귀결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동과 서로 나뉜 우크라이나의 분열과 정치 구도는 대립하는 양 진영에 개입의 동기를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의 국내 정치적 분열은 친(親)서방과 친러시아 간 외교 안보 노선의 커다란 진폭을 노정했고, 지정학적 단층대의 활성화와 맞물리면서 강대국 개입의 조건을 제공해 영토 통합성과 주권 훼손의 뼈아픈 결과로 이어졌다. 지정학적 중간국의 외교는 신중해야 하고 폭넓은 국내 정치적 합의에 기반이 필요하다.

이런 교훈은 미·중 전략경쟁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국 외교의 딜레마와 도전을 심각하게 겪고 있는 한국 외교에 난제를 제기한다. 첫째, 한국 외교의 균형점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한·미 동맹은 한국 외교의 근간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중요하다. 하나를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양자택일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환경 조건과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냉철한 국익 기반의 실용외교를 실현해야 한다. 둘째, 중간국 외교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외교적 자율성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어떻게든 모순적 상황을 소화하면서 지정학적 중간국 연대나 소다자 협력과 같은 창조적 전략으로 다층적 국제 정치 구도에서의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외교 이슈와 관련된 국내 정치적 분열을 관리할 과제다. 이를 위해 한국도 이제는 가치와 정체성 외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한국 외교 지향의 기반으로서 정체성 외교가 필요하다. 예컨대 선진적 산업화와 성공적 민주화를 성취한 유일한 한국의 경험은 가치 있는 자산이며, 이는 곧 한국적 정체성의 주요한 근간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과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이 미·중 전략경쟁의 파고를 견디고 미래로 나아가는 기반이 될 것이다.


신범식 서울대 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