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지난해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1000만 대가량 생산 차질을 빚었다. 연간 글로벌 자동차 수요(8415만 대)의 12%에 달하는 규모다. 반면 전기차 시장은 급격하게 확대됐다. 지난해 세계에서 958만 대 팔리며 전년 대비 62.1% 급증했다.

반도체 공급난과 전기차 수요 성장은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 격변을 가져왔다. 일본 도요타는 미국에서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현대자동차·기아는 미국 진출 35년 만에 처음으로 혼다를 밀어내고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반도체 못구해 GM·포드 헤맬 때…현대차·도요타 美서 날았다

친환경차로 질주한 자동차 기업들

5일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등에 따르면 도요타는 지난해 미국에서 233만2261대를 판매해 GM(220만2598대)을 넘어섰다. GM은 판매량이 전년 대비 13.1% 줄어든 반면 도요타는 10.4% 늘리며 역전에 성공했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 148만9118대를 판매해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현대차 78만7702대, 기아 70만1416대로 각각 종전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혼다도 판매를 8.9% 늘리긴 했지만, 21.6%나 성장한 현대차·기아엔 역부족이었다.

글로벌 완성차 시장의 지각변동 단초는 반도체 쇼티지(공급 부족)였다. GM, 포드 등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로 대부분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이들은 코로나19 충격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할 것으로 판단, 지난해 반도체 주문량을 대폭 줄였다.

반면 현대차·기아와 도요타는 국내외 공장 가동을 지속하는 등 생산력을 유지했다. 이 결과 코로나19 보복소비에 따른 수요 급증에 대비할 수 있었다. 현대차·기아의 경우 2020년 2월 중국산 와이어링 하네스 공급 부족에 따른 공장 가동 중단 이후 공급망을 다변화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관측이다.

하이브리드카, 전기차 등 친환경차 시장에 먼저 뛰어든 것도 역전의 배경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1~11월에만 수소차, 전기차, 하이브리드카 등 친환경차를 10만886대 판매하며 전년 대비 196.5% 늘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전기차 조기 전환에 힘을 실어준 것도 도움이 됐다.

현대차·기아의 제품 경쟁력도 크게 높아졌다.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가 미국 시장에서 판매 신기록을 세우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몸값이 뛴 제네시스는 현지에서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 렉서스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다.

뒤늦게 반격 나선 내연기관 강자들

GM, 포드는 절치부심하며 곧바로 대반격에 나섰다. 포드는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픽업트럭 F-150을 변신시켰다. 지난해 전기차 버전인 F-150 라이트닝을 공개한 뒤 폭발적인 선주문을 받고 있다. 20만 대 선주문이 몰리며 공급 능력을 초과하자 예약 판매를 중단했을 정도다. 포드는 4일(현지시간) F-150 라이트닝 생산 규모를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인기에 걸맞게 생산능력을 확충하겠다는 소식에 주가는 11.67% 올랐다.

GM도 마찬가지다. 메리 바라 GM 회장은 5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2’에서 처음으로 전기 픽업트럭 쉐보레 실버라도 EV를 선보인다. 조만간 전기 픽업 GMC 허머 EV를 출시하는 데 이어 내년에 실버라도 EV로 전기차 대중화를 이끌겠다는 전략이다. 전기차 후발주자로 평가받는 스텔란티스도 올해 본격 경쟁에 뛰어든다.

테슬라가 주도한 전기차 시장에 애플도 가세할 전망이다. 미국 블룸버그는 “애플카 프로젝트 연구 기간이 어느덧 8년차를 향해가고 있다”며 “올해가 애플카 탄생의 중추적인 해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자율주행차 기술은 이미 구글, 인텔 등이 선도하고 있다. 구글의 웨이모, 인텔의 모빌아이 등이 자율주행 부문에서 세계 선두에 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영원한 강자’는 사라지고,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 1위를 차지한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도요타에 대해 “미국에서 본격화하는 전기차 경쟁에서는 선수를 뺏겼다”며 “1위를 했다는 것에 기뻐하고만 있을 순 없다”고 전했다.

김일규/고재연 기자/도쿄=정영효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