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28일 개최 예정…코로나19 상황 따라 일정 미뤄질 수도
"실질적 독립군 지도자…업적 조명하는 계기 되길"
'청산리 전투 영웅' 서일 선생…서거 100주년 행사 추진
일제 강점기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을 대파한 독립군의 지도자 서일 선생을 조명하는 행사가 추진된다.

광복회 인천시지부 연수구지회는 독립운동가 서일 선생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음 달 28일 개최할 방침이라고 14일 밝혔다.

이 행사는 서 선생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넋을 기리고 업적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애초 이달 26일 연수구청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구청사 강당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다음 달로 연기됐다.

지회는 현재 코로나19 상황을 살피며 행사 개최 장소를 찾고 있다.

후보지로는 인천 송도 컨벤시아와 서울 광복회 본회 등이 거론된다.

장소가 결정되더라도 코로나19 상황이 악화하면 행사 일정은 재차 연기된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서일(徐一) 선생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한 농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8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경성 성일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했으며 이후에는 후학 양성에 전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5세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을, 30세 때에는 우리나라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사건인 '경술국치'를 겪었다.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하던 그는 31세가 된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해 무력 항쟁 체제 구축에 나섰다.

아울러 한반도에서 기원한 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해 포교에 나섰으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10만여 명의 교우를 모았다.

이어 교우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교우 1명당 1원씩 거둬들여 자금을 마련하는 등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고 대일항쟁을 준비했다.

1918년에는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동지 39명과 함께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일민보', '신국보' 등 신문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1919∼1920년 중광단을 1천500여 명 규모의 독립군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확대·개편해 이끌었으며 소련(현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총기 등 3만여 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최대 전과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다.

이 전투는 북로군정서가 1920년 10월 만주 허룽현 청산리 등지에서 다른 독립군인 '대한독립군'과 함께 독립군 토벌에 나선 일본군을 10여 차례의 전투로 거의 몰살시킨 사건이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이, 대한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이 지휘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서 선생은 북로군정서 등 10개 부대를 규합해 3천500여 명 규모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에 올라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본의 외교 압박을 받은 소련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한 '흑하사변(黑河事變)'이 발발, 대한독립군단이 와해하고 동지들이 희생되자 서일 선생은 1921년 8월 27일 자진 순국하며 41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형철(77) 광복회 인천시지부 연수구지회장은 "서 선생은 인천에 연고가 없지만, 손자인 서만섭(92)씨와 증손자 서희우(63)씨가 인천 연수구에 오랫동안 거주해 연수구지회에서 이번 행사를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김좌진·홍범도 장군은 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 독립군을 이끈 서일 선생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며 "이번 행사로 서 선생을 알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후손들이 도움을 받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청산리 전투 영웅' 서일 선생…서거 100주년 행사 추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