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1418년 "봉황새가 중국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신하가 "순(舜)과 문왕(文王) 같은 덕이 있어야 봉황새가 와서 춤춘다"고 답한다.
봉황은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새였던 셈이다.
조선시대 후기 민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봉황을 묘사한 그림이 1908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나타났다.
임금이 앉는 어좌(御座) 뒤에 해와 달과 봉우리 다섯 개를 그린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봉황도가 걸린 것이다.
봉황도에서 봉황 두 마리는 꽁지깃을 교차하고 있다.
이 그림과 관련해 김현지 문화재청 감정위원은 신간 '꽃과 동물로 본 세상'(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에서 "봉황은 일본의 의도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식민지 조선을 강등, 격하하는 데 적절한 주제였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조선시대에 이렇게 대형으로 배경 없이 봉황만 단독으로 그린 봉황도는 거의 없고, 19세기 궁중장식화에 묘사된 봉황 이미지와도 다르다"며 "상체를 숙이거나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는 등 유려한 곡선으로 묘사되던 전통적 봉황 자세가 아니라 매우 경직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봉황의 발 모양도 조선 봉황도가 아닌 일본 봉황도와 비슷하다"며 "이 그림이 제작된 시기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될 즈음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에 의해 '황제 폐하'에서 '왕 전하'로 강등된 조선의 현실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는 1907년 고종이 퇴위하도록 했고, 아들인 순종을 대한제국 황제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 나서 3년 뒤인 1910년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다.
김 위원은 1920년 재건한 창덕궁 대조전에 새롭게 등장한 봉황도 벽화에 대해서도 인정전 봉황도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대조전 봉황도가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봉황새가 나는데 날개를 펄럭이다 머물 곳 찾아 내려앉네. 여러 임금님의 훌륭한 신하 모셨는데 군자님들 부리시어 천자님을 아끼고 받들게 하시네"라는 구절을 표현한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대조전 벽화에 묘사된 봉황 열 마리는 천자를 아끼고 받들기 위해 모여든 신하를 상징하지만, 봉황 자체가 가진 다양하고 중층적인 상징성 때문에 의도를 숨기고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책에는 이외에도 미술사학 연구자들이 꽃과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에 관해 쓴 다양한 논고가 실렸다.
권혁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무관 초상화와 흉배(胸背, 가슴과 등에 붙이는 표장)에 그려진 동물을 분석했고, 김울림 국립춘천박물관장은 까치·호랑이 그림을 연구한 글을 수록했다.
최북·홍세섭·이한복 등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꽃과 동물 그림, 중국 화조화(花鳥畵, 꽃과 새 그림)와 영모화(翎毛畵, 새와 짐승 그림)에 대한 논문도 읽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