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에서의 육체와 도시
리처드 세넷 지음
임동근 옮김
문학동네
492쪽 | 2만4000원
도시의 역사는 외적을 막기 위해 외벽을 쌓으면서 시작했다. 고대 아테네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성벽을 축조했고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는 성벽으로 도시를 요새화했다. 중세 도시는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성이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는 이처럼 사람들의 삶을 구획하고 구속한다. 도시의 건축물이 육체의 뼈대라면 도로와 수로 같은 수많은 길은 혈관이고, 거기서 인간들이 이뤄내는 정치, 경제, 문화 활동은 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를 계획·설계하는 일은 현재의 삶을 비추면서 동시에 미래의 삶을 예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도시의 역사는 도시가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시민의 삶이 다시 도시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의 파노라마다.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격언처럼 중세 도시의 경제는 개인행동의 자유를 가져다줬다. 반면에 종교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고 돌보는 장소였다. 경제와 종교,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사이의 긴장은 현대도시의 특징인 이중성의 첫 징후였다. 이 갈등이 빚은 비극이 베네치아의 게토다. 16세기 유대인을 격리하기 위해 만든 게토는 기독교 공동체가 경제권을 장악한 이교도를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을 이질적이고 타락한 육체로 치부함으로써 자신들의 순수한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고, 자유와 접촉의 두려움이라는 모순을 안은 채 근대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1628년 윌리엄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는 당시 육체에 관한 과학적 혁명을 일으켰다.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자본주의 탄생과 동시에 일어났고, 이른바 개인주의라는 거대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도시를 사람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쉴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자 했는데, 동맥과 정맥의 혈관 시스템을 모델로 교통시스템을 구축했다.
프랑스혁명을 겪으면서 19세기 도시계획의 목적은 군중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조직화된 집단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였다. 도시 공간을 지나는 개인들의 육체는 공간에 대한 소속감이 없어졌고 점차 타인과 공동운명체란 의식을 상실했다. 영국 런던의 리젠트가로 조성, 오스만 남작이 주도한 파리의 대규모 재개발이 이때 이뤄진 도시 프로젝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버트 모지스는 뉴욕의 교통체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는데, 고속도로와 교량을 외부로 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교외로 탈출하게 만들었다.
현대도시에선 이제 속도와 편안함, 개인주의가 지배적 가치가 됐다. 카페에 앉은 개인은 수동적으로 거리의 군중을 구경하게 됐고 공공장소에서의 침묵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미덕이 됐다. 접촉의 두려움이 도시를 지배하고 접촉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드러나게 벽을 세워 가두지 않았을 뿐 오늘날에도 도시 안에 수많은 게토가 존재한다. 빈부, 계급, 인종, 성, 민족 등 차별과 분리의 근거가 더욱 다양해졌다. 하지만 현대의 다문화 도시에서 개인들의 차이가 서로를 회피하는 근거가 아니라 접촉의 지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한 이해를 바꾸면 된다. 육체는 주기적으로 위기에 노출되지 않으면 외부 자극에 대한 내성이 부족해 오히려 병든다. 개인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건강한 시민적 육체 회복이 절실한 이유다. ‘도시사회학의 거장’인 저자는 도시사회학, 비교역사뿐만 아니라 문화사회학의 영역을 아우르면서 익명의 도시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이드 역할을 한다.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